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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80] 정가신을 기리기 위한 나주 ‘설재서원(雪齋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20 23:59:42
  • 수정 2022-09-21 22: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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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에 있는 조선후기 정가신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688년(숙종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가신(鄭可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노안면 금안리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693년(숙종 19)에 정식(鄭軾)을 추가배향하고 1723년(경종 3)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1725년(영조 1)에 신장(申檣), 1756년(영조 32)에 정담(鄭湛)을 추가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향사(享祀)만 중지되고 건물은 훼철되지 않았고, 1953년부터 다시 향사를 지내고 있다. 


1953년에 정상(鄭詳).정여린(鄭如麟).정란(鄭瀾)을 추가배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설재사(雪齋祠), 재명문(齊明門), 4칸의 영모재(永慕齋), 정문, 4칸의 고사(雇舍), 3칸의 창고 등이 있다. 사우(祠宇)인 설재사에는 정가신을 주벽(主壁)으로 해 좌우에 정식.신장.정담.정상.정여린.정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시조 정해의 증손자 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나주 사람으로 자는 남헌, 호는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해 1259년(고려 고종 46년) 문과에 급제해 충열왕 3년(1277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열왕 6년) 승지가 됐다. 1284년(충열왕 10년) 밀직학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에 다녀 왔고,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한 후 1290(고려 충렬왕 16년)년 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사의(師儀)가 돼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절사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가 됐고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됐다.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고 청렴결백했다. 


필자적(必闍赤)이라는 특수기구의 구성원이 되어서는, 관료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또 국왕의 사명辭命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그의 시 몇 편이 실려 전하는데, 그 중 하나를 들어보면 그의 절묘한 표현이 납득이 간다.



한평생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을 어찌 헤아리리,벽 가운데 푸른 등 걸어놓은 밤 마음마저 서늘하구나.

만호의 풍진은 어찌 저리 분주한고,한 숲의 연기와 달은 아득하기만 한데

平生出處若爲量 半壁靑燈夜意凉 萬戶風塵何擾擾 一林煙月奈茫茫 


골짜기 산짐승은 좌선하는 바위에 스스럼없이 걸터앉고,강해오라기는 때맞춰 주소註疏짓는 당堂으로 날아드네.

어느 해 벼슬 버리고 구름 속 찾아 누워, 한 물병 한 석장으로 내 살림 삼으리.

洞猿不避安禪石 江鷺時來撰疏堂 雲臥他年拂衣去 好於甁錫付閑忙


정가신이 충렬왕 때 세자를 따라 원(元) 나라로 가 거기에서 세조(世祖) 황제가 중히 여기게 되어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원 나라에 있을 때의 정가신은 고향집을 그리워 하며 사향시(思鄕詩)를 짓기를  


고국의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그 산 밑에 내가 살던 초가삼간 있네.

골목과 뒤안의 버들과 복숭아는 내가 친히 심었으니 / 봄이 오면 응당 주인 오기를 기다리겠지

海東南有錦城山 山下吾廬草數間 巷柳園桃親手種  春來應待主人還



내 집은 머나먼 삼천리 밖에 있고/내 몸은 화려한 십이제왕성에서 놀고 있구나

옥통소를 불며 고향 생각을 달래는데/창밖의 무심한 달은 벌써 새벽녘을 알리고 있구나.

家在三千里外地  身遊十二帝王城 玉簫吹斷江南夢 窓外無心月五㪅

"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충렬왕이 낮은 신분 출신을 중심으로 한 측근세력을 중용하면서부터 정가신과 국왕의 관계는 멀어져 갔다. 정가신은 문반유사文班儒士의 주도 아래 유교적 덕목에 따른 위민爲民의 정치, 민생民生을 우선시하는 정치가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충렬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훗날 정가신이 충선왕의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했던 것은 그와 같은 갈등의 결과였다.


사림원詞林院의 신진학사들을 중심으로 충렬왕대 정치의 폐단을 쇄신하려던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정가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충선왕의 개혁 시도는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충렬왕 측근세력의 방해 책동과 원의 내정간섭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근심어린 눈길로 지켜보던 정가신은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 분명해지자 그만 음독자살(飮毒自殺)하고 말았다. 지방 출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 개혁을 추진하던 유능한 신진인사로서 기득권을 고집하는 구세력과 외세에 밀려 좌절하는 전형이 정가신이었던 것이다.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1344~1423년)는 정가신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정가신의 5세손 정식(鄭軾. 1407~1467년)이 세종 때 문과에 급제했고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정벌(野人征伐)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정국(鄭菊)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일헌(逸軒) 정심(鄭諶. 1520~1602년). 부사(府使)를 역임한 정상(鄭詳. 1533~1609년) 등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으로 일컬어진 정여린(鄭如麟. 1564~1640년)이 뛰어났다.



또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사정(司正)과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정기수(鄭麒壽)와 수군방어사를 지낸 정봉수(鄭鳳壽),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정응(鄭應), 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 1583~1656년),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가문을 대표하는 후손들이다.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품(祭品)은 3변(邊)3두(豆)이며, 유물로는 금안장(金鞍)이 소장돼 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강당인 영모재는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은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품(祭品)은 3변(邊)3두(豆)이며, 유물로는 금안장(金鞍)이 소장돼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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