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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5 서원의 이해(1)] 서원의 성립배경과 성립과정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5 13:08:08
  • 수정 2022-12-26 10: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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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부터로,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했으나,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흔히 서재(書齋).사우(祠宇) 등과 혼칭되고 성격도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서원의 성립 배경


서원이 성립하게 된 배경은 조선 초부터 계속되어온 사림의 향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들은 향촌사회에 있어서 자기세력기반 구축의 한 방법으로 일찍부터 사창제(社倉制).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개별적으로 시행해왔다. 특히 정계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는 이를 공식화해 국가정책으로까지 뒷받침받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 구심체로서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향권독점을 두려워한 훈구척신(勳舊戚臣) 계열의 집요한 반대와 경재소(京在所)에 의한 방해로 좌절됐다. 그러나 다시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본래의 의도를 관철코자 했으나, 그들의 노력은 연산군대의 거듭된 사화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향촌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체로 서원이 성립.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하지만 정작 서원이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기에 성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사림의 정계 재진출에 따라 그 정책으로 제시됐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교학체제의 혁신에 있었다.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던 신진사류들은 지치(至治)의 재현을 목표로 도학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그 중의 하나인 문묘종사운동은 사람마다 도학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고 이를 숭상토록 하기 위해 도학에 뛰어난 학자를 문묘에 제향해야 한다는 명분에 근거를 두고, 사림계 유학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의 종사를 추진했다.


이는 그 자체가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에 대한 교화라는 명분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이것이 곧 서원이 발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한편, 당시의 훈척계열이 쇠잔한 관학을 존속시키는 방향에서 그 개선책을 모색했던 반면, 사림계의 경우는 그들이 내세우는 도학정치를 담당할 인재의 양성과 사문의 진흥을 도모키 위해 위기지학(爲己之學) 위주의 새로운 교학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물론 그들이 곧 실각함으로써 관학에 대체할 새로운 교학기구의 모색은 중단됐지만, 이러한 과정이 뒷날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를 위한 장소로서 서원의 출현을 가져온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 서원의 성립 과정


주세붕 초상주세붕은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로 부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했다.


또한 영남감사(嶺南監司)의 물질적 지원과 지방유지의 도움으로 서적과 학전(學田)을 구입하고 노비 및 원속(院屬)을 확충하는 등 그 영속화를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이를 기초로 유생을 교육해 여러 명의 급제자를 내게 하는 등 서원체제를 갖추는 데 노력했으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가 위주이었고,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해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화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습속(習俗)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밖에는 없으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도장으로 중국에서 발달돼온 서원제도가 우리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해 서원의 존재이유를 제시했다.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전경/문화재청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군수에 임명되면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했다.


그는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그 보급에 주력했다.


초창기인 명종 연간에 건립된 서원수가 18개 소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서원보급에 미친 그의 영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외면적인 확대와 함께 서원의 내용면에서의 충실에도 유의했다.


유생의 장수처로서의 강당과 존현처로서의 사묘를 구비한 서원체제를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의 학습활동과 그 운영방안을 규정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부터 계속된 향촌에서 사림활동의 구심체적 기구의 모색 노력은 중종초 조광조일파의 신진사류에 의한 문묘종사운동 및 새로운 교학체제 모색을 통해 그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서원의 형태로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고, 이황에 의해 정착,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도산서원 강당/문화재청 한편,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유림들에 의해 사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 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돼,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고,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했다.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해, 사액서원의 효시가 됐다. 


그 뒤 전국의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해,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 서원이 있었다. 그 뒤 영조 때에는 서원폐단의 격화로 인한 강력한 단속으로 사액은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 서원의 전개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후일에 이를수록 인물 위주로 남설(濫設)돼 사우와의 구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첩설을 금지하는 조처로 처음에는 사우로 이름했다가 금령(禁令)이 완화되면 서원으로 승격시킨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서원으로 설립됐다가 금령에 저촉돼 사우로 강호(降號)되거나 아예 철폐된 것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암서원 학연루 그러나 정조 때 편찬된 ‘조두록 俎豆錄’과 고종 때에 증보된 ‘문헌비고’ 및 ‘열읍원우사적 列邑院宇事蹟’ 등에 기재된 서원명단을 토대로, ‘서원등록 書院謄錄’ 및 ‘승정원일기’ 등 연대기류에 나타난 철폐된 서원을 조사해 합하면 대략적인 건립추세는 짐작할 수 있다. 


서원은 전 시기에 걸쳐 8도에 417개 소가 있었고, 사우는 492개 소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후기, 특히 숙종 때 서원이 남설되면서부터 서원.사우의 구별이 모호해졌고, 사우까지도 서원과 비슷한 성격으로 파악해 양자를 합하면 모두 909개 소에 이른다.


1741년(영조 17) 서원철폐론의 당시 서원.사우 등 여러 명칭을 모두 헤아린 숫자가 1,000여개 소에 가깝다고 말한 것이 통계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 통계에 나타난 서원건립의 추세를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따른 내용적인 면에서의 변천을 고려해 조선 서원의 전개과정을 살펴본다면, 우선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의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의 남설기, 그리고 영조 17년 이후의 서원철폐 및 쇠퇴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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