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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4] 사육신 김문기 공 향례를 올리는 ‘나산서원’ 外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5 12:36:36
  • 수정 2022-08-16 09: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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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산서원(羅山書院)


김문기(死六臣 金文起 1399~1456년 6월 8일)는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 초명은 효기 자는 여공 호는 백촌 본관은 김녕이다. 김녕군 김시흥의 9대세 손이며 호조판서 김 순의 손자요 증 영의정 김 관의 아들로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했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 정언,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나산서원은 백촌 할아버지의 6세손 인 김녕김씨 14세손 나산 입향조 제학(提鶴)공의 후손들이 사육신 김 문기 공 향례를 올리는 나산서원이다. 겨울의 높은 산에 외로운 소나무가 모진서리에 오히려 푸름이 자연의 철칙이다. 충과 절의가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음이 천지의 바른 기상이요 삼강오륜의 올바른 길이다.



요컨대 조선 초기역사에 세종대왕의 손자인 6대 임금으로 오른 어린 단종(12세)을 숙부 이신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자 불의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단종의 충신들은 세조2년 복위운동을 전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중추역할을 맡은 백촌 김 문기 할아버지께서는 환형(轘形)을 당하셨고 아들 여병재공(如瓶齋公) 현석은 교수형으로 1456년6/8에 아들과 함께 순직(殉職) 했다. 


손자인 충립과 어린 아우들은 16세미만으로 목숨은 구제 했으나 관직과 신분은 박탈 되였고 충립(忠立당시14세) 이하 손자들은 모두 상주(尙州) 관아(官衙)로 정속(定屬)됐고 일부는 고관의 종과 노비(奴婢)로 가게 됐다 한다.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275년을 넘게 말을 다 할 수 없는 고뇌의 삶을 감추면서 살아온 것이다. 즉 오늘날 김녕 김씨의 충의공 파를 있게 하신 백촌 할아버지의 신원 복관작은 14세손 휘 논학공(제학兄)의 장손이신 이휘(爾輝) 할아버지께서는 신원 복관작을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숙종24년 1698년에 단종(端宗)이 복위(復位)되고,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모든 충신(忠臣)들이 착착 복관작(復官爵)됐으나 백촌 할아버지의 신원은 예외였다.


백촌 할아버지의 신원(伸寃)이 되지 않으므로 16세손 이휘(爾輝)공께서는 영동현감(縣監) 충청감사(忠淸監司)등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백촌(白村) 선조의 신원(伸寃)을 호소(呼訴) 했으나 몇 해가 가도록 아무런 반응(反應)이 없으므로 공은 숙종 43년(1717) 1월 19일에 한양(漢陽)으로 올라가 당시 신문고제도가 폐지됐던 금지사항을 어기면서 통화문(通化門) 안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북을 치니 놀란 의금부(義禁府) 관원들이 공에게 태형(笞刑) 三十대를 치며 문초했다. 



공은 백촌 선조의 억울함을 세세히 호소(呼訴)해 이 사안(事案) 처리를 의금부, 형조(刑曹), 병조(兵曹), 예조(禮曹) 등으로 넘기더니 나중에는 충청감사에게 보내 조사케 했다. 그러나 자기부서의 소관(所管)이 아니라거나, 선조가 병자사화(丙子士禍)때 순절(殉節)하신 증거가 없다거나, 이휘공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들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공께서는 각 처로 다니시면서 증거자료를 수집해 제출, 일단 신원(伸寃)의 실마리를 마련했고, 숙종(肅宗)께서도 김감(金堪, 金文起 父)의 예에 따라 신설(伸雪)해 주라는 명(命)을 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휘(1649~1719졸70세)공은 여사(旅舍)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받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한양(漢陽)에서 客死(객사)했고 숙종 임금에서 영조 임금으로 왕권이 바뀌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신원복관작 회신을 기다리던 이휘(爾輝)공의 손자(長孫) 18세손 휘 정구(鼎九) 공께서는 신원 복관작 소식이 없고 할아버지마저 객사 했으니 조부(祖父)의 뒤를 이어 나섰다. 영조께서 궁(宮) 밖 거동(擧動)하는 기회를 얻어 죽음을 무릎 쓰고 꽹과리를 치면서 영조대왕에게 호소할 구실을 만들어 조부 이휘(爾輝)공께서 송원(訟寃) 하셨던 사실을 전하게 됐고, 백촌(白村)선조의 억울함과 신원(伸寃)을 호소했다. 


그러자 영조(英祖) 7년 1731년 3월26일에 백촌(白村)할아버지의 복관작(復官爵) 교지(敎旨)를 내렸다. 백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275년 만에 신원이 복 관작 됐고 후손들은 연좌제를 벗으면서 그 어두웠던 고뇌의 삶이 끝이 난 것이다. 교지를 받은 지 47년 후 정조2년 1778년에 좌찬성(종1픔)에 추증 되면서 충의(忠毅)의 시호를 받게 됐고 1791년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됐다. 

 


이 나산서원은 조선 초기역사에 수 십 년 전부터 사육신(死六臣)의 정통성에 관한 논란으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연 류성원 유응부 여섯 분 중 유응부 사육신은 지금까지 역사에 잘못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전고대방 내용(강효석)의 인물 사(史) 기록은 남효온(야사)이 쓴 추강전의 오류임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이 세상에 널리 공개됨으로 억울하게 역사에 왜곡돼 묻혀 버릴 뿐 한 백촌 김문기 선생을 1977년 역사편찬위원회의에서 선생을 사육신으로 바르게 현창돼 서울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모시고 의절사에도 위패를 봉안해 지금까지 현창해 오고 있다. 


# 동강서원




1996년 1월 20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포항시와 경주시에 걸쳐 있는 형제산(兄弟山) 중 제산(弟山) 자락에 자리잡았다. 조선 중종때의 문신 손중돈(孫仲暾)을 향사하고 높은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묘우(廟宇)를 중심으로 강당.동재.서재.신도비각.관리사 등의 건물이 있다.




손중돈의 자는 대발(大發),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손소(孫昭)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482년(성종 13) 사마시에 합격, 이후 도승지세 번, 대사간 네 번, 경상.충청.전라.평안.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와 우참찬 등 요직을 거친 후 청백리에 선정됐다.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재직할 때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오늘날의 상주 속수서원)을 건립했다. 


# 장산서원/조선후기 이전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을 봉향하는 곳이다. 본래 장산서원은 정조 4년(1780)에 영천군 임고면 장산리에 창건했나 고종 5년 (1868)에 금령으로 훼철됐고, 2007년 4월에 이곳으로 이건 복향했다. 


묘우는 선계묘(善繼廟), 강당은 지습당(智習堂), 동.서재는 심고재(尋古齋)와 지사재(志思齋), 삼문은 초요문(超邀門), 그리고 경각과 관리실이 있다. 




공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여주이고 회재 이언적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약관 때 이미 서천잠(誓天箴)을 짓고, ‘차라리 성인을 배워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한 가지 기예(技藝)나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다. 


장산서원 편액 글씨는 박광보, 선계묘 지습당 초요문은 박양보가 썼다. 심고재와 지사재는 바군환, 경각은 최채량이 썼다. 복향 상량문은 권헌조, 복향 기문은 이영원, 봉안문은 이진기가 지었다. 제향은 매년 3월 초경일(初庚日)에 행한다./사진-한국관광공사,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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