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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 26] 23대 순조와 순원황후의 능 ‘인릉仁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31 07:35:50
  • 수정 2023-03-13 13: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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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능으로, 인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우왕좌비(右王左妃)의 형식에 따라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에 순원숙황후를 모셨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비각안에는 두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左’)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左‘)이다.


능침에는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라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인릉은 원래 파주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데, 천장 후에 편찬한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는 능침 석물을 다시 사용한 기록이 있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1469년(예종 1)에 세종의 영릉(英陵)을 천장하고 묻은 구 영릉(英陵) 석물과 1537년(중종 32)에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을 천장하고 묻은 구 희릉(禧陵) 석물이다. 


따라서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 대부분의 석물은 구 영릉과 구 희릉의 석물을 다시 사용했고,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했다. 이는 왕릉 천장으로 드는 국고문제를 해결키 위해서 조치한 것이다.


1834년(순조 34)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35년(헌종 1)에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長陵) 근처에 능을 조성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론이 제기되면서 1855년(철종 6)부터 본격적인 천장 논의를 해 다음해인 1856년(철종 7)에 헌릉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다. 그 후 1857년(철종 8)에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했다. 



순조(재세 : 1790년 음력 6월 18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 재위 : 1800년 음력 7월 4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는 정조와 유비(綏妃) 박씨의 아들로 1790년(정조 14)에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1800년(정조 24)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데, 이 시기에 정순왕후를 비롯한 벽파와 시파가 대립하는 시기였고, 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라고 불리는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1년 사이에 300명의 교인이 학살당했다. 이 후 경주 김씨의 세도가 잠깐 있었다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면서 세도가 약화됐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금 순원숙황후의 아버지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조정의 요직은 외척 중심으로 독점되었고, 척신들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와 함께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1811년) 등 민란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됐다. 


순조는 세도정치를 견제키 위해 아들 효명세자(문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해 수습하려 했으나 효명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무산되고 말았다. 재위기간 중 ’만기요람‘ ’홍제전서‘ 등을 간행했다. 


그 후 1834년(순조 34)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로 세상을 떠나, 묘호를 순종(純宗)이라 했다가 1857년(철종 8)에 묘호를 순조로 추존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조숙황제로 추존됐다. 



순원숙황후 김씨(재세 : 1789년 음력 5월 15일 ~ 1857년 음력 8월 4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의 딸로 1789년(정조 13)에 한성부 양생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순원숙황후는 1800년(정조 24)에 있었던 왕세자빈 간택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김조순의 딸, 서기수의 딸, 박종만의 딸, 신집의 딸, 윤수만의 딸이 두 번째 간택에 선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김조순에게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 윗전 어른들이 여러 처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이어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번 보시고는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이 모두가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며 청음(淸陰, 김상헌), 문곡(文谷, 김수항), 몽와(夢窩, 김창집), 죽취(竹醉, 김제겸)가 쌓아올린 경사인 것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하사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렇게 왕세자빈 간택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삼간택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802년(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됐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순원숙황후의 집안이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돼 세도의 틀을 마련했으나 조정과 사회는 불안정했다. 1834년(순조 34)에 손자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고, 인척 김조근의 딸을 왕비(효현성황후)로 간택시켰다. 


이후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아들 원범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다.(철종)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렴청정을 했고, 인척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장황후)로 간택시켜 세도정권의 절정기를 맞게 했다. 조선의 왕비 중 최초로 2대를 걸쳐 수렴청정을 한 순원숙황후는 1857년(철종 8)에 창덕궁 양심합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원숙황후로 추존됐다./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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