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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 24]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능 ‘융릉隆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30 06:02:52
  • 수정 2023-03-13 13: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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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융릉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태로, 1789년(정조 13)에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이다.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고,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형태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다.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다.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됐다고 한다.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했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했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해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했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했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돼 융릉이라 했다.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 ~ 1762년 음력 윤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3세가 됐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고,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해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됐다. 


특히 1762년(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으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뒀다.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왕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정성왕후의 혼전)에 예를 행하도록 했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왕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왕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왕세자의 자결을 재촉하니, 왕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해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했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 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됐다. 



왕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왕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왕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왕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고, 1899년(광무 3)에는 왕으로 추존돼 묘호를 장종이라 했다가 곧 바로 황제로 추존돼 장조의황제라 했다.


헌경의황후 홍씨(재세 : 1735년 음력 6월 18일 ~ 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년(영조 11)에 반송방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에 왕세자빈에 책봉됐고, 1762년(영조 38)에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에 봉해졌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했다. 헌경의황후의 아버지와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폐세자를 주장하는 노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숙부 홍인한은 심지어 영조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인 1775년(영조 51) 11월에 이른바 ‘삼불필지설’을 내세워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혜경궁 홍씨는 왕세자의 참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1795년(정조 19) 친정 조카 홍수영의 소청에 의해 장조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다.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을 하다가 1815년(순조 15)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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