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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 17]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 ‘장릉長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24 15:14:26
  • 수정 2023-03-13 13: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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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이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었다가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했다. 특히 옛 장릉의 석물과 천장하면서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금천교,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향로와 어로는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변로를 깔았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다. 



혼유석은 합장릉의 형태로 2좌를 배치했다. 특히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해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1635년(인조 13)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636년에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했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공사했다. 이후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했다. 그러나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에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변이 계속되자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다.



인조(재세 : 1595년 음력 11월 7일 ~ 1649년 음력 5월 8일, 재위 : 1623년 음력 3월 13일 ~ 1649년 음력 5월 8일)는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1595년(선조 28)에 임진왜란으로 피란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이 됐고 이후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에 서인 정권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摠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즉위 초에 반정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수습했고,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해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하기도 했다. 결국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다시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했으나 청나라에 항복해 삼전도에서 수난을 당했다. 


그 후 1649년(인조 27)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를 열조(烈祖)라 했으나, 최종적으로 묘호를 인조라 했다.



인열왕후 한씨(재세 : 1594년 음력 7월 1일 ~ 1635년 음력 12월 9일)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황씨의 딸로 1594년(선조 27)에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에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청성현부인에 봉해졌고, 1623년에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인조 사이에서 6남 1녀를 낳았고, 1635년(인조 13)에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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