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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 13]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 ‘강릉康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19 17:43:02
  • 수정 2023-03-13 13: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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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강릉은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으로, 강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볼 때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전체적인 능침은 문정왕후의 태릉과 같은 형태로 조성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했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향.어로, 정자각, 비각이 있고, 정자각 왼편에는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마실 물을 위해 판 우물로,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명종은 모후 문정왕후의 3년 상을 마친 후 며칠이 지난 1567년(명종 22)에 세상을 떠나, 태릉 동쪽 언덕에 먼저 능을 조성했다. 그 후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강릉 좌측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했다.



명종(재세 : 1534년 음력 5월 22일 ~ 1567년 음력 6월 28일, 재위 : 1545년 음력 7월 6일 ~ 1567년 음력 6월 28일)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에 태어났다. 


1539년(중종 34)에 경원대군에 책봉됐고, 1545년(인종 9개월)에 이복형 인종의 유명(遺命)으로 왕위에 올랐다.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수렴청정 기간 중에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해 사회가 불안했고,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런 상황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1553년(명종 8)에 친정 선포 후, 외척을 견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 했으나, 소윤과 문정왕후의 권세에 눌려 뜻을 펴보지 못했다. 1563년(명종 18)에 외아들 순회세자의 급서와 1565년(명종 22)에 문정왕후의 장례를 치른 후 1567년(명종 22)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 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눠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면서 의적 행각을 벌였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인순왕후 심씨(재세 : 1532년 ~ 1575년 음력 1월 2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릉부원군 심강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32년(중종 27)에 태어났다. 1542년(중종 27)에 경원대군과 결혼해 부부인(府夫人)에 됐고,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명종 18)에 어린 나이로 급서하는 비운을 겪었다.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어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통을 잇게 했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하자 계승상 모후가 되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8개월만에 물러났다. 그 후 1575년(선조 8)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의 결정권은 형식적으로나마 대비에게로 이양된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이자, 선왕의 부인이다. 


비록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이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임종을 맞을 당시 양심당의 소침 병풍 뒤에서 명종의 죽음을 지켜봤야 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가 조선의 14대 왕 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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