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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22] 왕후가 되지 못한 왕의 어머니를 모신 ‘칠궁’(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7-08 23:27:47
  • 수정 2024-04-15 17: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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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박광준 기자] 조선시대에 왕의 어머니였지만 왕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일곱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문화재청이 관리한다. 이들은 왕후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어서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으로 일곱 후궁의 아들 가운데 실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영조, 경종, 순조 뿐이다. 


영조의 첫째 아들 진종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고,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사서 죽었다. 인조의 아버지로 훗날 추존왕이 된 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조선시대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온 나라가 망해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육상궁과 연우궁 출입문후궁은 일곱이지만 남편인 왕은 선조(1명), 숙종(2명), 영조(2명), 정조(1명), 고종(1명) 다섯 명이다. 특히 일반인도 잘 알고 있는 후궁으로는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왕후에 올랐다 폐비가 된 희빈 장씨와 무수리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을 낳은 고종의 후궁 순헌왕귀비 엄씨이다.


왕들은 왕후가 되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와 첫 아들을 낳아 주고 죽은 후궁을 위해 사당을 짓고 좋은 휘호를 내려 추앙했다. 


육상궁은 복을 기른다. 연우궁은 길이길이 돕는다. 경우궁은 크게 돕는다. 선희궁은 행복을 베푼다. 저경궁은 행복을 쌓는다. 대빈궁은 궁녀 중에 으뜸이다. 덕안궁은 덕을 편안히 한다. 는 뜻이다. 


육상궁과 연우궁 정면 모습 

육상궁과 연우궁 뒷면에서 바라본 출입문 모습  

이 궁은 숙종의 후궁으로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영조 원년(1725년)에 지어져서 처음에는 숙빈묘라 했고, 영조 20년(1744년)에 육상묘로 부르다가 영조 29년(1882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가 고종 20년(1883년) 6월에 다시 지어져 현재에 이른다.


고종 7년(1870년)에 연우궁(영조의 후궁정빈 이씨)이 옮겨 왔고, 1908년에 저경궁(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과 대빈궁(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과 선희궁(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과 경우궁(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이, 1929년에 덕안궁(고종의 후궁 엄씨)이 옮겨오면서 칠궁이 됐다.


칠궁은 종묘와 함께 왕실의 신주를 모신 사당 제도의 귀중한 표본으로 인정받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됐으나, 칠궁은 청와대와 붙어 있어 1968년 1.21 사태 이후 경호상의 문제로 출입이 금지돼 오다가 국민의 정부 때인 2001년 11월 24일 다시 일반에 공개됐다.

 

육상궁과 연우궁 측면 모습

육상궁과 연우궁 뒷면에서 바라본 누각 모습 

왕의 어머니였지만 왕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후궁들의신위를 모신 칠궁에는 7개의 사당이 아니라 5개의 사당밖에 없다. 그 이유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와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시를 1개의 건물에 모셨기 때문이다. 또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와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도 1개의 건물에 모셔져 있고, 나머지 3명은 각각 1개의 사당에 모셔져 있어 5개의 사당밖에 없다.


제사 때는 왕이 육상궁의 재실에 나와서 대기하기도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송숙재(왼쪽)와 풍월헌(오른쪽)이다. 정면 8간 측면 3간으로 돼 있고 송죽재와 풍월헌이라는 현판 두 개가 동서에 걸려 있다. 송죽재와 풍월헌 뒤편으로는 안채 격인 삼락당이 있다. 삼락당은 정면 7간, 측면 3간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이들 건물은 조선 민가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신주를 임시로 보관하던 이안청. 육상궁과 연호궁의 앞면에 동서로 대칭되게 마주보고 있다냉천정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하던 집으로 육상궁.영호궁 경역과 대빈궁.경우궁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1725년에 육상궁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칸은 온돌방, 동편 한 칸은 대청으로 돼 있다. 


제사 때는 냉천정의 뒤편에 있는 냉천아라는 우물물을 사용했다. 냉천의 벽면에는 1727년에 영조가 쓴 냉천과 냉천정에 대한 오언시가 새겨져 있다. 냉천정의 앞마당에는 ‘자연’이라고 새겨진 직사각현 모양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냉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아 만든 것이다. 


육상궁 재실 뒷모습. 왼쪽이 송죽재이고 가운데가 풍월헌이고오른쪽이 안채 격인 삼락당이다. 

육상궁 재실 추녀영조는 궁궐에서 물 깃는 무수리였던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아들로서의 소임을 다해, 영조의 효성을 알 수 있다.


영조 3년(1727년)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냉천이 옛날에는 중국 항주의 영은산이 있었고, 오늘은 이곳 정자가 있구나!, 두 손으로 맑은 물을 어루만지니, 차가운 샘물이 가히 좋구나!’


제사를 모시기 전에 목욕재계하는 영조의 모습에서 어머니 숙빈 최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진-박광준 기자/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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