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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1절과 독도
  • 이근봉/천지개벽TV 대표
  • 등록 2022-03-06 18: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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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3.1절 기념일이 벌써 103회를 맞이하게 된다. 103회가 되었지만 일본은 아직도 속 시원하게 자기의 잘못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고 그저 우물쭈물 넘어가고 있다.


그 첫째로 아직도 위안부에게 사과하지 않고 보상도 하지 않고 위안부 집회는 30주년이 되고 말았다.


일본 일왕, 일본 정부, 일본 국민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2일 병합조약을 가용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최고통치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으며, 한국사회를 식민지 지배구조로 재편하기 위해 1910년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 당했고 정치, 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수탈당했다.


1910년에 회사령이 실시되어 민족자본가의 성장이 가로막혔다. 1910~18년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한말이래 불법적으로 토지를 침탈해온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이때 일제는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경작 등 농민의 여러 권리는 완전히 부정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몰락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빈민, 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노동자가 된 조선인들은 장시간 농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등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며 일을 했고 우리 민족은 일본의 갖은 학대를 받으며 민족 언어를 말살시키고 말도 일본어를 사용케 하고 민족문화 모든 것을 일본화하기 위하여 그들을 36년간 갖은 수단을 다 부려 우리 민족을 괴롭힌 일본이다.


일본은 명산마다 찾아다니며 민족정기의 맥을 끊기 위해 바위에다 쇠파이프를 박고 또한 그것도 모자라 민족의 개 삽살개를 다 잡아 죽였고 그 삽살개 가죽으로 원피를 만들어 조선원피판매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삽살개는 천연기념을 368호이다.)


이런 나쁜 짓을 한 그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찌 일본을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결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기지건설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운동, 교육문화운동 및 생존권수호투쟁등을 통해 운동역량이 강화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1910년말경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제1차세계대전 대전국가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 해방운동을 고양시켰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 33명이 결정되었고 광화문 기념비각 앞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만세시위운동 주동자들을 학살하는 일본군의 저지가 있었지만 이 운동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고, 도쿄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어를 발표했다. (2.8 독립선언)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 최린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이승훈등 평안도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등이 참여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그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만주, 의주, 선천, 원산등지에서 동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정식으로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히게 된 것이다.


또한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어서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 후속조치로 3월 5일 서울역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고 3월 상순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쓸었던 시위운동의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89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되었다. (일본측의 발표 참고)


이보다 더 많은 부상자와 손상이 컸다고 봐야하는 것이 일본측은 축소를 해서 발표를 했을 것이니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언제나 일본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우리 선열들의 피와 죽음이 헛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침략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가 일본 영토라 우기며 일본 학생들에게 한국이 불법으로 독도를 점령하고 있다고 왜곡의 역사를 가르친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독도는 분명 대한민국 영토임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일본을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정신을 바로 차려 일본은 경계해야 되며 독도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요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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