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정기의 공연산책 203] 백기완을 사모하는 화가 18인 展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2-03-01 08:57:07
  • 수정 2023-02-15 08:23:26

기사수정

전시기간 1부 2022년 2월 14일~3월 2일

2주 2022년 3월 3일~3월 17일


전시장소  백기완 노나메기재단 (현)통일문제연구소(종로구 명륜동 4가 후암씨어터 옆 골목)


명륜동 백기완 노나메기재단 (현)통일문제연구소(백기완 선생 주택)에서 故 백기완 선생 1주기기념 화가와 조각가 18인展을 관람했다.


백기완(1932~2021) 선생은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천석꾼의 부자집 손자였다. 1992년 『월간 길』 12월호에 실린 황광우 씨의 글 ‘민중후보 백기완의 일대기’에 따르면, 백기완의 할아버지 백태주 씨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주는 활동을 하는 등 독립 운동에 헌신적이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수천 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은율에 피신해 있던 백범 김구를 극진히 돌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들이 빌미가 되어 일본 경찰에 고문을 받고 숨을 거둔다. 


해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열세 살의 소년 백기완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한 인텔리였던 아버지 백홍렬과 둘째 형,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유학을 간다. 어머니와 누이, 큰 형은 고향 은율에 남았고, 그것이 그들과의 그리고 고향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서울에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은율의 일도국민학교 이후 서울에서는 신흥대학교(경희대학교 전신)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故 방송작가 김기팔과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다가 군에 징집되어 복무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청년 백기완은 청년들을 조직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개진한다. 



농민운동을 계기로 평생의 동반자가 된 김정숙 여사도 만난다. 1956년 농민운동과 관련해 강연자로 참석한 자리에서 당시 덕성여대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던 김정숙 여사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그의 말대로 ‘한살매’를 함께 한다. 그러자 1961년에 벌어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백기완은 본격적으로 반정부 투쟁에 나서게 된다. 


특히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수교회담에 나서게 되자 적극적으로 이에 대한 반대 투쟁에 앞장선다. 이 시기 많은 재야인사들과 친분을 쌓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사상계』를 발간한 재야 지도자 장준하와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1967년엔 장준하와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한다. 설립 이후부터 통일문제연구소로 개편한 뒤에도 이 기관은 많은 재야인사들의 사랑방 노릇을 했다.


故 오윤(1947~1986)의 채색 목판화 <칼노래>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선 모든 집회가 신고 대상이었기 때문에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를 진행하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연다. ‘YWCA 위장결혼사건’이 그것이다. 주례 역할을 맡은 백기완과 그의 동료들은 전두환이 지휘하던 보안사에 끌려간다. 거기서 그는 이후 그의 건강에 큰 영향을 준 혹독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이 잇달았다. 2년 뒤 석방된 백기완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위장결혼사건을 함께한 최열이 그를 강원도에 모시고 가서 요양을 시켰다. 


故 손장섭(1941~2021)의 아크릴화 <광탄 마장리 향나무>, 

심정수(1942~)의 청동조각 <북소리>1987년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계기로 온 국민의 분노가 들끓었고, 백기완도 그 열기에 함께하며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고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이 모두 출마를 해 야권이 분열된 상황에서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출마해 야권 대통합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의 ‘민주 대 연대’ 거부로 야권통합은 무산되었고, 백기완은 대선 이틀 전에 ‘민주 대 연대’를 이루지 못한 데 책임을 지고 후보사퇴를 했다. 1992년 대선 후보로 다시 나온 그는 5위로 낙선을 하고, 이후 통일문제 등에 주력하며 시민운동을 해나갔다.


주재환(1940~)의 콜라주 <나의 앞날은?>

민정기(1949~) 유채 <추수>

백기완에게 언제나 중요한 것은 민중의 해방이었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민중해방을 말했고 또 그 말을 실천하며 백기완은 언제나 두루마기를 걸치고 헝클어진 백발머리를 한 채 장산곶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매로 ‘민중 해방’을 부르짖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노나메기’의 뜻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란 의미이다.


박흥순(1951~)의 유채 <백기완과 장산곶매>전시작품은 故 오윤(1947~1986)의 채색 목판화 <칼노래>, 故 손장섭(1941~2021)의 아크릴화 <광탄 마장리 향나무>, 주재환(1940~)의 콜라주 <나의 앞날은?>, 심정수(1942~)의 청동조각 <북소리>, 신학철(1943~)의 유채 <백산 일어서다>, 김정헌(1946~) 아크릴화 <광주항쟁 10주년에>, 민정기(1949~) 유채 <추수>, 임옥상(1950~)의 흙 먹 아크릴<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 박흥순(1951~)의 유채 <백기완과 장산곶매>, 황재형(1952~)의 유채 <건들마 2>, 홍선웅(1952~)의 채식 목판화 <정병과 산다화>, 장경호(1953~) 아크릴화 <묵시>, 이종구(1954~)의 아크릴화 <별-백기완 선생>, 김봉준(1954~)의 목판화 <3,1 백년>, 박불똥(1956~)의 콜라주 <풍경-곧추 서다>, 김준권(1956~)의 수묵목판 <산에-산에>, 이기연(1957~)의 목판화 <백기완 선생님>, 류연복(1958~)의 소명다색목판 <꽃 한 송이> 등이 백 선생 주택거실에 전시되어, 화가와 조각가 나름대로의 개성적 화풍과 독특하고 절묘한 표현방법으로 수준급 전시회를 창출해 냈다. 


황재형(1952~)의 유채 <건들마 2>필자의 동료와 후배들의 작품이라 친근감을 갖고 관람했으며, 후배들 중에는 민정기 화백과 임옥상 화백은 필자가 연출한 미대극회 연극 <혈거부족> <안네 프랑크의 일기> <신의 대리인>에 출연해 탁월한 연기 기량을 발휘했고, 여름방학에 농촌연구회 계몽활동을 울주군 삼평리 삼평국민학교에서 벌였을 때, 후배인 김정헌 역시 함께 참가해 열정을 다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전시회 총감독은 미술평론가인 유홍준이 맡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백기완을 사모하는 화가와 조각가 18인 展>은 대학로 후암씨어터 옆 골목 백기완 선생 주택인 (백기완 노나메기재단 (현)통일문제연구소)에서 전시되고 있기에 많은 연극동지들의 관람을 바라는 마음이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