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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5 ] 경주 옥산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1-15 22: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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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572년(선조5년)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 1528∼1608)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키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했다. 다음 해 1573년 2월 16일에 인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봉안돼 있던 이언적의 위판(位版)을 옮기고 처음 향사를(享祀)를 행했고, 1574년(선조7년) 12월에 경상도 관찰사 김계휘(金繼輝, 1526∼1582, 김장생의 부친)의 제청에 따라 선조로부터 ‘옥산(玉山)’이라고 사액(賜額) 됐다. 


이때 편액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가 교서를 받들어 썼고,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1572년 2월에 시작해 8월에 총 40칸의 건물이 완성됐다. 경내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 된 묘우(廟宇)를 비롯해, 구인당(求仁堂).암수재(闇修齋).민구재(敏求齋).무변루(無邊樓).역락문(亦樂門).신도비각(神道碑閣).경각(經閣).판각(板閣).제기실(祭器室).포사(庖舍).체인문(體仁門)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1967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서원은 전면에 강학처소(講學處所)를 두고 뒤편에 사당(祠堂)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누문(樓門)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이 무변루 밑으로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의 안마당이다. 구인당 좌우로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 잡고 있어, 구인당과 함께 강학처소를 이루고 있다. 


1967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서원은 전면에 강학처소(講學處所)를 두고 뒤편에 사당(祠堂)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누문(樓門)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이 무변루 밑으로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求仁堂)의 안마당에 이르도록 돼 있다. 


구인당(求仁堂) 좌우로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 잡고 있어, 구인당과 함께 강학처소를 이루고 있다. 구인당 뒤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체인문을 둘러싼 담장 안에 체인묘(體仁廟)와 제기실(祭器室)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중심부 남측에는 부대시설인 고직사(庫直舍).판각(板閣) 등이 있고, 담장 밖 남측에 경각(經閣), 북측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 역락문(亦樂門)



서원의 정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이 역락문은 논어에 있는 ‘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이자원방래 불역낙호)’의 ‘亦樂’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역락문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명명하고, 액찬(額贊)을 했다. ‘亦樂門’ 편액은 한석봉(韓石峯, 1543∼1605)의 글씨다.


#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



역락문을 들어서면 문변루를 지나기전 물을 흐르게 만들어 두었는데 다른 서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왕릉이나 사찰입구에 만들어 흐르거나 시내를 지나는 다리가 있는 것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의미와 속계(俗界)와 신계(神界)를 구분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 무변루(無邊樓)


구인당쪽에서 본 무변루무변(無邊)은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주염계찬(周廉溪贊)’ 가운데 풍월무변(風月無邊, 아름다운 자연은 끝이 없다)에서 취한 것이다. ‘無邊樓’ 편액은 전형적인 한석봉의 글씨이고, 편액 좌측에 작은 글씨로 노수신이 액찬 했다. 



처음 문루 이름을 납청루(納淸樓)라 했으나 노수신이 선생이 남긴 업적과 생애에 맞지 않다고 해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기와집으로, 1층의 어간(御間)에 대문을 달고, 양측은 2층 온돌방의 구들과 아궁이를 두었다. 2층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양측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둘레에는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러 개방하였다. 구조는 초익공식으로 5량가구(五樑架構)를 이루고 있다.  


옥산서원의 주 건물인 구인당(求仁堂)

옥산서원(玉山書院) 편액그리고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직전인 54세(1839년)에 쓴 것이다. 편액 왼쪽에 ‘만력갑술사액후 이백육십년기해실화개서 선양(萬曆甲戌賜額後 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揚)이라고 작은 글씨로 그 연유를 써 놨다. 구인당이 260년 후 기해년(1839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하면서 다시 써서 왕이 하사한 편액이라는 내용이다. 


추사글씨의 현판 뒤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쓴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이산해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선생의 친조카로 영의정을 지냈고, 명필로도 유명하다. 어릴 때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왼쪽에 보면 ‘옛날 편액 글씨를 베껴서 만들어 걸었다’는 의미의 ‘구액모게(舊額摹揭)’ 글이 새겨져 있다. 


강학당(講學堂) 

무변루를 마주보는 건물이 옥산서원의 주 건물인 강당(講堂) 구인당(求仁堂)이다. 구인(求仁)의 뜻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선생의 저서 가운데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인(仁)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러한 회재선생의 뜻을 안 후학들이 그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구인당은 강당으로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됐다. 이 ‘求仁堂’의 편액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여기도 노수신의 액찬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의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 위에는 주좌(柱座)를 둥글게 솟아오르도록 만든 초석들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圓柱)들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굽면이 사면으로 끊긴 주두(柱頭)를 놓고, 끝이 위로 향한 소 혀 모양 장식인 앙서[仰舌]가 뻗은 부재를 기둥 윗몸에서 냈다. 안쪽으로는 기둥과 보 사이를 보강해 주는 보아지 형태로 하여 주두와 보머리를 결구해 이익공(二翼工)처럼 보이지만, 부재의 구성 방법은 초익공식(初翼工式)이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그 위에 파련각(波蓮刻)으로 된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宗樑]를 받친 후, 여기에 꾸밈새인 첨차(檐遮)와 소호로 이뤄진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돼 있고, 중앙이 우물마루로 된 대청과 좌우는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구인당 마루 양 옆에는 양진재(兩進齋, 남쪽 방)와 해립재(偕立齋, 북쪽 방)가 있는데 교수, 유사(有司)들이 기거 하던 곳이다. 양진재는 명(明)을, 해립재는 의(義) 각각 뜻한다. 각각의 액찬(額讚)은 노수신이 했다.


양진재(兩進齋)

양진(兩進)은 명(明)과 성(誠) 둘을 갖추어 전진함을 말하는 것으로, 명(明)은 도덕을 밝힌다는 뜻이고, 성(誠)은 의지를 성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중용에 ‘명은 선을 밝게 앎이요, 성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이니, 천리의 본연이다(誠者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라는 뜻이다. 이는 가르치는 이가 명선(明善)을 거쳐 성실(誠實)함을 이뤄야 함을 말한다.


해립재(偕立齋) 해립은 경의해립(敬義偕立)의 뜻으로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 모든 사물에 대처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적 규범으로서의 경(敬)을 중시함과 똑같은 비중으로 외적 규범으로서의 의(義)를 중시함을 뜻한다.


참고로 옥산서원의 풍수를 살펴보면 어래산(漁來山, 572m)이 북 현무(玄武)이고, 자옥산(紫玉山, 570m)이 남 주작(朱雀)인 안산(案山)이다. 그리고 자계천(紫溪川)은 북출남류(北出南流)로 보아야 한다. 좌향은 거의 서향에 가깝다. 주로 서원이나 향교는 정남향으로 세우는데 반해 옥산서원은 서향으로 지어졌다. 이는 산세와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산이 있을 경우에는 강학당이 앞에 오고 위패를 모신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이다. 그리고 강학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옥산서원은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는 남재이고, 서재인 암수재(闇修齋)는 북재인 셈이다.


 구인당 앞쪽의 남재와 북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민도리집 계통의 건축물이다. 일반적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으나 옥산서원은 지형상 남재와 북재로 배치됐다. 편의상 모두 동재와 서재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도 동재.서재로 부른다. 동재에는 고참들이, 서재는 신참들이 기거했었다. 


동재(東齋) 민구재(敏求齋) 민구재의 민구(敏求)는 ‘好古敏以求之(호고민이구지)’란 뜻이라고 한다. 이는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그쳐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고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궁행(實踐躬行)해 사회에 공헌하는 데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서재(西齋) 암수재(闇修齋)

암수재(闇修齋)의 암수(闇修)는 주자자찬(朱子自贊) 가운데 ‘闇然自修(암연자수)’의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闇은 ‘숨을 암’이고 修는 ‘닦을 수’이니 이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게 밝게 펼쳐져 나감을 뜻한다. 


신도비(神道碑) 신도비각은 1577년에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셨고, 경각과 판각에는 각종 판각 및 어서를 보관했다. 당대 이황과 이기논쟁으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쓴 신도문이 새겨진 신도비이다. 당대 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기대승도 이황과 함께 역시 이언적의 학문을 인정하고 그를 존경했던 듯 이언적의 묘와 이언적이 배향된 서원에 이렇게 신도비를 남기고 있다.  



신도비각과 사당 체인묘(體仁廟) 체인묘(體仁廟)

체인묘는 사당으로 ‘사람은 인(仁)을 체(體)로 삼아 성장한다’는 뜻의 生物之春 在我而仁 體之以身 何不長人(생물지춘 재아이인 체지이신 하불장인)에서 따왔다.


인을 체득한 사람 회재 이언적,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지에서 죽은 바 되었으나 이렇게 죽은 지 20년 만에 임금의 명령으로 서원에 배향됨으로써 명예회복을 이루지만 서인 중의 주류였던 노론과 기호학파 출신이 아니라 남인이며, 영남학파란 이유에서 그는 온전하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문원공의 시호와 영의정 추증은 당대 사회가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사진-이승준 기자 


문집판각

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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