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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한 경주 불국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2-01 19:27:29
  • 수정 2024-02-18 19: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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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경주의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했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했고,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했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해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했고,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돼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돼 있다. 그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32칸)·천불전(千佛殿, 25칸) 등이 있고, 이 두 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十王殿, 5칸).십륙응진전(十六應眞殿, 5칸).문수전(文殊殿, 5칸)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4칸).서당(4칸).동별실(5칸).서별실(5칸).청풍료(淸風寮).명월료(明月寮).객실.영빈료 등이 있었다. 그 밖에 누.각·문.고·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돼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과 1024년(현종 15)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했고, 1172년(명종 2)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고, 1312년(충선왕 4)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했다. 1436년(세종 18)에는 대웅전과 관음전(觀音殿)과 자하문(紫霞門)을 중수했고, 1470년(성종 1)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절을 중수했다.


1514년(중종 9)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에는 대웅전을 중수했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해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췄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춰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해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됐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했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했고,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했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했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됐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했다.



그 뒤 또다시 퇴락돼 가던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됐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해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해 준공했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毘盧殿).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됐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泛影樓).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뤄놓았다.


# 석단(石壇)과 석교(石橋)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돼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고, 굵고 굳센 돌기둥과 돌띠로 둘러 견고한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해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냈다. .



이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국보 제23호인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돼 있고, 칠보교.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됐다. 


이 가운데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다. 33계단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을 정화해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1686년(숙종 12)과 1715년(숙종 41)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됐고,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없어졌던 돌난간도 복원했다.


#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이다.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함께 옛 모습을 찾았다.



이 회랑은 대웅전의 옆문과 통하게 돼 있다.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비슷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佛)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참배객은 최초의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나가게 된다.


# 범영루와 경루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했고, 아래에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년(경덕왕 10)에 건립했고, 1593년(선조 26)에 불탄 뒤 1612년(광해군 4)과 1688년(숙종 14)에 중건했고, 1708년(숙종 34)에 단청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 말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재건했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석가탑과 다보탑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국보 제21호로,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이 두 탑은 불국사의 사상 및 예술의 정수이다. '법화경'에 근거해 세워진 이 탑은 영원한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 이곳에 상주한다는 깊은 상징성을 가진 탑으로서, 불교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이기도 하다. 석가탑 내에서 발견된 유물인 국보 제126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표현하는 일곽의 중심을 이룬다. 현존하는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된 것이나, 그 초석과 석단 등은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돼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고,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 무설전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悟眞)·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했다. 이 건물도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년(숙종 34)에 중건해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됐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됐다가 1972년에 복원했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만 사용했고, 무설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 극락전과 안양문



입구에서 연화교.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곽도 751년에 지어졌고, 그 당시에는 회랑을 비롯해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 및 석조물들은 극락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신라 중기의 전형적인 정토계 사찰의 구조로서 매우 정돈된 것이었다.



안양문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26년(인조 4)과 1737년(영조 13)에 중창했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고,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안양문을 넘어서면 극락전에 이른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750년에 오환(悟還)·무숙(武淑) 등이 중창했고, 1925년 3월에 다시 중수했는데 목조의 수미단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까지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두 불상이 안치돼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시기 때 중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지금은 비로전으로 옮겼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해 올라가는 길에는 3열로 지어 쌓은 계단이 있다. 그 각각은 16계단이어서 모두 합하면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한 것으로, 48원을 성취해 극락세계를 건립한 법장비구(法藏比丘)의 뜻을 기린 것이다.


# 관음전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다.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년(성종 1)에 중수했는데, 1593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그 직후 1604년에 해청(海淸)이 중창했고, 1694년(숙종 21)과 1718년에 다시 중창했다. 원래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돼 있었다. 이 관음상은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해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상과 함께 영험력이 크다’하여 매우 존숭받았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1674년(숙종 즉위년)과 1701년.176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새로 금칠[改金]을 했다. 마지막 개금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 관음상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언제 관음상이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 비로전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수했으나, 조선 말에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1973년의 복원공사 때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했던 국보 제26호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봉안했다.


# 부속 암자 및 기타 유물




불국사를 처음 지을 때 토함산 일대에는 일곱 개의 암자가 있었다. 토함산에 칠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칠보동산이라고 했고, 따라서 일곱 군데에 암자를 짓고 금.은.진주 등 칠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지를 찾을 수 없다.




불국사 북쪽 탑동에는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했던 몽성암(夢成庵)과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된 암자들을 통합해 만들었던 심적암(沈寂庵), 1653년에 승려 지원(智元)이 치술령 서쪽 기슭에 세웠던 보덕굴(普德窟)·중굴·상굴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청련암(靑蓮庵).백련암(白蓮庵).운수암(雲水庵).천검암(天劍庵).운창암(雲剙庵).신도암(信道庵).임방암(林坊庵)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칠보교 앞에는 두 쌍의 간주(竿柱)가 서 있고 거대한 석조(石槽)가 보물 제1523호 경주 불국사 석조로 지정돼 있고, 불국사 경내에는 보물 제61호인 사리탑(舍利塔) 외에도 5기의 부도가 있다. 또한, 경내가 사적 제502호로 지정되어 있고, 199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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