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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이 삼국 통일후 부처의 힘 빌어 왜구의 침입 막고자 절을 세웠던 사찰 감은사 '감은사터'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1-12 11:34:50
  • 수정 2023-12-21 14: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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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면 용담리에 있는 감은사탑/사진-이승준 기자[이승준 기자] 감포 앞바다를 뒤로 하고 대종천을 거슬러 0.5㎞쯤 올라가면 문무대왕면 용당리로, 이곳에는 장대하고도 훤칠한 미남에 견줄 만한 석탑 두 기가 우뚝 선 절터가 있다. 절터가 들어선 곳은 일부러 주위보다 높게 다진 듯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데다, 풍채가 거대하고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하는 삼층석탑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통일신라 사찰의 전형인 쌍탑일금당의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을 뒤로 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문무왕이었지만 당시 시시때때로 쳐들어오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인 왜구에 대해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짓게 됐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어 신문왕이 다음 해인(682년)에 절을 완공해 감은사라 이름했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다. 



감은사탑은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최초의 것으로, 즉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됐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다.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른다.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돼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 


금당의 바닥 장치는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했다. 그리하여 장대석 밑은 빈 공간이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띈다.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임이 확실하다.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삼층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올랐다. 두 탑은 크기로 보나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에 있어서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멋진 탑이라 단정하는 데 이의가 없다.



통일된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안정을 기원하는 뜻에서 감은사가 지어졌듯, 그 같은 시대정신은 웅장하고 엄숙하고 안정된 삼층석탑을 낳게 했던 것이다. 감은사탑은 튼실한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옥개석)의 끝이 경사를 이루는, 통일신라 7세기 후반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 뒤쪽 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절터와 주변 경치가 어우러진 속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탑을 볼 수가 있다. 감은사터는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기운차고 견실하며, 장중하면서도 질박함을 잃지 않는 이 위대한 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삼층탑으로 화강암 상하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축조됐다. 신문왕 2년(682), 축조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 작품이다.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통일신라 초기의 삼층석탑으로 웅장하고 장중하다.

우선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됐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매의 석재로 구성했고, 갑석 또한 12매이다. 기단 양쪽에 우주가 있고 탱주가 3주씩 있다. 상층 기단 면석 역시 12매에 갑석은 8매로 구성됐고 2주의 탱주가 있다.


다른 절터에서는 보기 드문 태극문양과 기하학적 무늬가 눈에 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옥신)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고 2층 몸돌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했다.


지붕돌의 구성은 각층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각기 따로 조립됐다. 각각 4매석이고, 층급받침은 각층 5단으로 짜여졌고 낙수면의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고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3층 지붕돌 위부터 시작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으나, 현재 약 3.9m 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해 탑신부에 꽂혀 있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13m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찰주를 빼면 높이가 9.1m로 고선사탑과 비슷한 높이가 된다. 그러나 찰주가 없는 고선사탑에 견주어본다면 이 찰주로 인해 석탑이 갖게 되는 상승감의 의미를 알게 된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안정감과 상승감에서의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3개의 몸돌을 실측해보면 그 폭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있고, 높이는 4:3:2가 아닌 4:2:2로 나타난다. 곧 1층 몸돌이 2, 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감은사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959년 감은사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중 서탑 3층 몸돌의 사리공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 모양의 청동 사리함이 발견됐다. 정교한 연화문 받침에 57×29.5㎝, 깊이 29.1㎝ 크기의 함을 놓았고 함의 네 모서리에는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고 각 좌우에 귀신 얼굴의 고리가 있다. 화려하고 섬세한 예술감과 간절한 종교적 감성이 한데 어우러진 이 사리함은 보물로 지정,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됐다. 



1959년 감은사 발굴조사 때 서탑에서 나온 수레 모양의 청동제 사리장치. 정교한 연화문이 새겨진 얇은 동판 위에 복부를 만들고 네 모서리에 여덟 개의 감실을 만들어 팔부신장을 안치했다. 또 중심부에는 작은 보주형의 사리탑을 만들어놓고 그 네 모서리에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좌상을 안치했다. 화려하고 섬세한 예술성과 종교적 감성이 잘 어우러진 이 사리함은 보물로 지정돼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한편 1996년 4월 동탑 수리 때는 높이 27㎝, 폭 19㎝로 네 면에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조각된 금동사리함이 발견됐다. 사리함 속의 금동사리장치는 높이 13.4㎝, 폭 14.5㎝의 2층 전각 모양으로 크기나 조각기법 등이 서탑 사리장치와 거의 같고, 사리장치 2층의 연꽃봉오리 모양 탑 속에서 수정사리병과 사리 55과가 나왔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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