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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20] 광화문 해치와 월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2-01 11:24:41
  • 수정 2024-04-15 17: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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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


[이승준 기자]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지금은 그 앞으로 세종로가 뻗어 있어 정면에서 통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지만 한때는 국왕과 문무대신이 수도 없이 드나들어 정문의 기능을 충실히 담당했던 곳이다. 



광화문이란 이름은 경복궁이 창건될 때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라, 1395년(태조 4) 태조는 정도전에게 완성된 경복궁의 사대문 이름을 지어 올리라고 명한다. 이에 따라 동문을 건춘, 서문을 영추, 북문을 신무, 그리고 남문, 즉 정문을 오문(午門)이라고 명명했지만, 이 이름은 세종 때 광화문이라 변경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리고 있다.



광화문은 세 개의 홍예문을 낸 높은 석축 위에 문루가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 가운데 이렇게 세워진 것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숭례문의 석축과 수법이 비슷하지만 중앙뿐 아니라 좌우에 하나씩 무지개문을 더 낸 것이 다르다. 가장 큰 가운데 문으로는 국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신하들이 드나들도록 했다. 광화문에 이어진 담장의 동쪽과 서쪽의 끝에는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솟아 있어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闕)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광화문과 이어진 담장 동서쪽 끝 모서리에 있던 망루로 서십자각은 사라져버렸고 동십자각만 도로 위에 홀로 남았다. 


법궁에 걸맞은 격과 위엄을 갖춘 광화문은 일제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한 나라의 국권과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면서 굳건히 서 있었지만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을 2개월 여 앞두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광화문을 철거하려 획책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끓었고 결국 해체 직전까지 몰렸던 광화문은 여론에 밀려 건춘문의 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짐으로써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반대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일본 민예운동의 선구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였다. 그는 1922년 '개조'(改造) 9월호에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혀버리려 하고 있다....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그것에 견줄 만한 것을 지금의 우리는 지을 수 없지 않은가? 오늘의 생활에 필요 없다고 해서 아낌없이 버려서는 안된다. 예술은 공리(公利) 관계를 초월한다.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길이 보존하라. 특히 순수한 동양의 것을 우리의 명예를 위해 열애하라. 그것들을 지키는 일은 조상에 대한 추모이며 예술에 대한 이해라고 굳게 믿으라....조선을 상기시키는 여러 관아를 좌우에 거느리고 우뚝 솟은 북한산을 배경으로 멀리 한길 너머로 광화문을 우러르는 그 광경을 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려하여 계획된 그 건축에는 이중의 아름다움이 있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꾸미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함부로 그 속에 있는 유기적인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된다...정치는 예술에 대해서까지 무례해서는 안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따위의 힘을 삼가라. 자진해서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 행할 바 아닌가. 우방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도시를 위해서, 특히 그 민족을 위해서, 저 경복궁을 건져 일으켜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로써 해야 할 정당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형태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광화문은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당해 모두 불타고 석축만 남게 됐다.


광화문의 옛 모습/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에 들어서기 전인 1910년경의 모습이다.1968년, 광화문이 마침내 제자리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됐다. 하지만 그것은 제자리도 아니고 본 모습도 아니었다. 돌아온 광화문은 본래 있던 자리에서 10여 미터 물러앉았고, 복원 당시 건물의 축을 근정전이 아닌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춰놓아 경복궁 남북 축에서 3.5° 동향으로 틀어져 있어 육안으로도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석축은 옮겨왔으나 타버린 문루는 나무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다. 세 개의 홍예문 가운데 좌우 협문의 천장에는 천마(天馬)와 영귀(靈龜)가 그려져 있다. 이것도 이때 복원하면서 추정해 다시 그려넣은 것이다.



‘광화문’이라는 한글 편액도 당시의 대통령 박정희의 친필이다. 그 무렵에는 현창사업용 건물을 콘크리트로 목조건축처럼 짓고 대통령이 편액을 쓰는 일이 다반사였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역사만큼이나 불행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본다면 세 개의 홍예문을 낸 장대한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양식에 우진각지붕을 한 2층의 문루를 올려, 장중하지만 무겁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경쾌함이 감도는 아름다운 건축이다. 



특히 백악의 줄기와 어우러지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자연과 건축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광화문 양옆에서 남쪽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는 석물 한 쌍은 흔히 해태라 불리는 해치상(獬豸像)이다. 해치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석공 이세욱의 솜씨로 탄생했다. 원래 놓였던 자리는 광화문 앞 80~90m 지점, 당시의 사헌부 앞, 오늘날의 정부종합청사 정문 근처와 길 건너 맞은편이었다. 나라를 잃은 오욕의 역사에 상처 입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마는 석물인 해치상도 지금의 자리에 남아 있기까지 순탄치 않은 길을 거쳐왔다.


1923년 10월, 총독부 건물의 외형이 갖춰지면서 해치상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1925년에야 사라진 해치상이 총독부 청사 서편 담장 밑에 방치됐음이 밝혀졌고, 해치상은 총독부 건물 완공 후 다시 청사 앞으로 옮겨졌고 해방 후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됐다.


# 광화문과 해치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되돌아왔으나 원래의 자리도 아닌데다 본 모습을 되찾지도 못했다. 광화문 양옆에 세워진 상상의 동물 해치는 덩치와는 달리 어수룩한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해치는 중국의 요임금시대에 세상에 나타났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논형'(論衡) '시응'(是應)편에는 해치가 뿔이 하나밖에 없고 죄지은 사람을 찾아내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고 전한다.


궁궐 앞에 해치상을 세우는 까닭은 궁궐을 출입하는 관료들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의미와 시비곡직을 가려내는 사법기관인 사헌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의 흉배 문양이 해태인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관악산의 강한 화기를 누르려는 의도로 세운 것이라는 주장은 실제 해치상을 만들어 세운 뜻과는 상관이 없다. 해치상 옆에는 노둣돌이 놓여 있었다. 이는 궁궐 영역을 표시해주던 것으로, 그 지점에서는 모두 가마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무언의 명령을 담고 있다.


광화문 앞의 해치상에는 우리의 미감이 모자람 없이 넉넉히 담겨 있다. 덩치는 크지만 사납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고, 날카롭기보다 둥글둥글해 어딘가 모르게 여유로움이 감돈다.


# 광화문 안마당


흥례문으로 이어지는 어도



광화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어도(御道, 임금이 다니던 길)가 중앙으로 깔려서 흥례문까지 이어진다. 흥례문과 그 양쪽의 행각 모두 산뜻한 모습과 색상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데요, 이들은 2000년대 이후에 복원된 건물이다.


궁궐의 길은 세 길, 삼도(三道)로 이뤄져 있니다. 박석을 깔아 낸 세 길 중에서 가운데에 조금 높이 솟아 있는 부분이 임금이 다니는 길 어도(御道)이고 동쪽에 붙은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에 붙은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이다. 그것은 조정의 품계석이 동쪽은 문신, 서쪽은 무신으로 배치된 것 때문인 듯하다.


광화문을 들어서서 중문(中門)인 흥례문에 이르는 마당에는 삼도가 아닌 어도만 넓은 폭으로 조성돼 있는데 이는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를 아우르는 공간이 궁(宮)이 아닌 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거처하는 궐(闕)이기 때문이다.


# 수문장청-동편



광화문 내측으로 인접한 좌우 측면에는 수문장청이 역시 복원돼 있다. 복원된 건축은 괜시리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면서며 내방객을 맞이하는 듯하다. 


광화문, 흥례문, 외행각 모두가 그 옛날에는 관직에 오른 중요한 문무 양반들이나 선택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21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광화문 돌담# 용성문(用成門)




흥례문 마당 왼쪽, 서쪽 담장에 세 칸 솟을대문으로 지어진 용성문이 있어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 고궁박물관으로 이어진다. 광화문 복원으로 예전에 허허벌판처럼 썰렁하던 공간이 이제는 구획 지어져서 몇 년 전 북경 자금성을 둘러보면서 느꼈던 기분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용성문이 용성문 스스로가 원한 바는 아닌 듯하지만 마치 고궁박물관의 정문처럼 됐다. 


# 궐로 들어오는 협생문(協生門)



반대편에는 한 칸짜리 협생문이 나 있다. 세자가 동궁으로 드는 오른쪽 측문 이극문에서 출발해 광화문 밖으로 이동할 때 지나는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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