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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21] 경복궁 동궁전(東宮殿) 일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2-01 13:02:07
  • 수정 2024-04-15 17: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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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7)

비현각 전경 

[이승준 기자] 동궁은 왕세자가 거처하면서 왕 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고 세자로서의 업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초기 동궁에 관한 기록으로는 태종 18년(1418) 6월 세자익위사를 따로 설치한 걸 보면 이미 동궁이 건립됐던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의 자리는 왕비가 낳은 왕의 적장자가 잇는 것이 원칙이고, 경칭은 저하(邸下)이다. 다른 말로는 동궁(東宮), 춘궁(春宮),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이 있다.


경복궁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다음 보위를 이어 갈 왕세자의 동궁전(東宮殿)으로, 왕세자가 거처하는 집을 가리키는 말과 함께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를 일컫는 호칭이 됐다. 왕세자의 집을 동쪽에 지은 이유는 동쪽의 개념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왕세자의 공간을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생명력이 가장 강한 동쪽 방위에 두어, 그 기운을 이어가게 하려 한 것이다. 세자 책봉례를 봄에 하는 것도 생명의 기운이 작동하는 계절의 의미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동궁 권역에는 세자를 제왕으로 만들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동궁에는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 세자궁에 딸린 내관의 처소, 세자가 신하들부터 조하를 받는 조당이 포함된다. 또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서연이나 시강 등의 강학을 받는 교육장과 세자를 위한 책고와 세자를 호위하는 시설 등이 있다.


경복궁의 동궁전은 근정전과 사정전의 동편에 있고 그 영역은 자선당과 비현각(丕顯閣)으로 구분돼 있다. 자선당은 왕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고 비현각은 세자의 집무공간이다. 동궁전 앞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춘방(春坊))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계방(桂坊))가 있어 세자를 다음 왕위를 이어갈 재목으로 키웠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거처했던 세자는 세종의 아들인 문종으로, 즉위하기까지 28년간 살았다. 문종은 이곳에 기거하면서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다연발 로켓포인 신기전 성능을 향상시키는 법도 연구했다. 고려 말 최무선이 발명했다는 주화(走火)를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장영실과 함께 측우기도 고안했다.


문종의 아내, 세자빈 권씨는 자선당에서 단종을 낳았지만, 원손 아기씨를 낳은 다음날 산후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문종 역시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목숨까지 잃게 된다. 


역사가들은 만약 문종이 장수했다면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 됐을 것이라고 한다. 역사에 가설이란 상상력에 불과한 일이지만 세종을 이어 문종이 조선을 경영했다면 그 나라는 분명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문종이 세자 시절, 첫번째 세자비로 김오문의 딸과 혼인했으나 부적을 부치는 등 질투가 심해서 퇴출됐다. 궁녀의 신발을 태워서 차에 타 문종에게 먹이려 했고, 뱀이 관계를 가질 때의 정기를 수건으로 받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발각되면서 폐빈됐다.


두 번째로 들인 봉여의 딸은 동성애자라 역시 퇴출됐다. 순빈 봉 씨는 소쌍이라는 궁녀를 범했다. 소쌍과 같이 잠을 자고 소쌍이 보이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듣고 세종이 소쌍을 불러 하문하자, 소쌍이 고하기를 순빈 봉씨가 자기 옷을 다 벗기고 남자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동성애자가...하긴 그건 타고나는 성적 정체성이니...


그리고 세 번째로 혼인한 권 씨(현덕왕후)는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단종을 낳았지만 산후조리 부실로 출산 후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로 문종은 정식 왕비가 없이 지냈다.


# 미성문(美成門)



근정전 동편 행각으로 나 있는 일각문을 나가면 왼쪽편으로 길을 가로막은 미성문이 있다. 미성문은 동궁전에서 소주방과 사정전 서행각으로 진입하는 통문이다. 자선당 서쪽에 있는 문으로 삼비문(三備門)의 북쪽 편에 자리 잡았다. 1999년 복원 때 세워졌다. 


‘미성(美成)’이란 ‘아름다움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세자의 아름다운 덕이 이뤄지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덕, 좋은 일을 가리키고, ‘미(美)’는 속체로 썼다.


# 숭덕문(崇德門). 



미성문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면 계조당(繼照堂) 터에서 자선당으로 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문이 숭덕문이다. 근정전의 동쪽 담과 동궁의 서쪽 담 사이에 있고, 융문루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나온다.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숭덕(崇德)’이란 ‘덕을 높임’, ‘덕이 있는 이를 높임’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덕이 있는 이를 높임’의 의미로 쓰였다. ‘德(덕)’은 속자로 써서 ‘心(심)’ 위에 ‘一(일)’ 획이 생략돼 있다.


# 삼비문(三備門)



미성문에서 숭덕문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좌측으로 자선당으로 이르는 삼비문이 나 있다. 자선당 앞에 있는 문으로, ‘삼비(三備)’는 ‘세 가지를 갖춘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 가지의 덕목은 1)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을 섬기는 것’, 2)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섬기는 것’, 3) ‘어린 사람의 입장에서 어른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 중광문(重光門)



삼비문을 들어가면 좌측으로 자선당으로 들어가는 남외행각의 출입문인 중광문이 나온다. 전방으로는 멀리 이극문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자선당 앞의 행각은 장방형으로 구성돼 있고, 남측 외행각 안쪽으로 다시 중행각을 둬 자선당 영역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남외행각의 문은 중광문으로 2개를 내고 있는데 행각과 같은 높이로 구성돼 있고, 외행각과 중행각으로 둘러싸인 중정의 서쪽은 막혀있고 동쪽으로 비현각에 들어가는 통문이 나 있다.


#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으로 들어가는 중행각의 문은 한 개로 구성돼 있는 데 외행각과 마찬가지로 행각의 높이와 동일하게 설치돼 있다. 진화문은 자선당의 남쪽문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의 문은 1999년 복원됐다. ‘진화(震化)’란 ‘왕세자가 변화됨’을 뜻한다. ‘진(震)’은 ‘왕세자.장자’, ‘화(化)’는 ‘변화함’을 의미한다. 


# 진화문(震化門)



진화문으로 들어가면 동궁인 자선당을 만나게 된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했고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곳에서 문종이 28년간 세자 노릇을 했고 1441년에는 단종이 태어났다. 세자빈 권 씨(현덕왕후)는 세종 23년 7월 23일 자선당에서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죽는다. 만약 현덕왕후 권 씨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다면 세조의 왕위찬탈과 같은 비극도 막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고종 25년(1888) 경복궁 중건 후에는 고종의 왕세자 순종이 자선당에서 거처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고,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 전각이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됐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다. 



자선당은 화강석으로 세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 7 칸 x 측면 4 칸의 규모로 올린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중앙 정면 3칸 x 측면 2칸의 대청마루, 좌우 각 2개씩의 온돌방은 정면 2칸 x 측면 3칸의 규모로 두었다. 퇴칸은 대청 남북쪽에 정면 3칸 x 측면 1칸의 규모로, 각 온돌방 남쪽에 정면 2칸 x 측면 1칸의 규모로 뒀다. 대청은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고, 방은 남, 북 축으로는 트여있으나 동, 서 축으로는 구분이 돼 있다. 지붕의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양성바름을 했고, 지붕에는 취두, 용두, 잡상을 설치했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설치했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아 절제된 화려함을 추구했고 그 위에 창방을 두고 그 상부에 운공을 설치했다. 기둥은 네모나게 세웠고 내부에 2개의 고주를 세우고 7개의 도리를 둔 2 고주 7 량가 형식을 띄고 있다. 단청은 모로 단청으로 했다.


자선당(資善堂)은 집의 이름 ‘자선(資善)’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으로, 현재의 현판은 각자장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긴 것이다. 



자선당 대청 바닥에는 우물마루가 설치돼 있고, 온돌방과 대청 사이에는 가운데만 창을 낸 불발기 창을 설치했다. 불발기창 안쪽으로는 완자 장지문을 설치했다.


자선당 내부를 오픈해 외부에서 창문으로 왕세자의 생활공간을 살펴볼 수 있게 돼 있다. 500년의 세월이 흘러 현대인은 과거 왕과 왕세자의 생활공간보다 더 편리하고 살기 좋은 거처에서 살고 있음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 길위문 



길위문(吉爲門)은 자선당의 진화문과 중광문 사이의 동쪽 행각의 문으로, 측간(변소)으로 통하는 한편, 외행각으로 둘러싸인 자선당의 중정으로 통하는 문이다.


‘길위(吉爲)’란 ‘선한 행동을 하다’ 또는 ‘복된 행동을 하다’는 뜻을 갖고 있고, ‘길(吉)’은 ‘선(善)’, 또는 ‘복(福)’의 뜻으로 쓰였다. ‘吉(길)’ 자의 윗부분이 표준 서체는 ‘士(사)’이지만 여기서는 ‘土(토)’의 형태를 취했다. 이는 서법에서 흔히 나타나는 속체이다.    


# 이모문(貽謨門)



길위문을 지나 동쪽으로 걸어가면 비현각의 외행각으로 2개의 문이 나 있는 이모문이 있다. 이모문은 비현각의 첫 번째 남쪽 문으로, 1867(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다. 지금의 문은 1999년 이 권역을 복원할 때 중건됐다. ‘이모(貽謨)’는 ‘선대 국왕이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貽)’는 ‘깨쳐 주다’, ‘모(謨)’는‘임금의 교훈’이라는 뜻이다. 


이모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비현각을 두르고 있는 내행각이 나온다. 이 행각에 낸 이름 없는 일각문을 통해 비현각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행각 및 외행각은 시중을 드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다른 행각과 마찬가지로 방, 대청, 주방, 문으로 구성돼 있다. 


# 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자선당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세자가 공부를 하면서 정무를 보던 외전에 해당하는 곳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동궁의 편당(便堂)이라고 했다. 


비현각은 장대석 세벌대 기단 위에 팔작지붕을 설치한 건축물로, 지붕에는 양성바름을 하지 않고 적색단을 쌓았다. 정면 6 칸 x 측면 2 칸의 규모로 중앙 대청 3칸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쪽으로 1 칸, 서쪽으로 2 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비현각의 경우에는 퇴칸이 없다. 


공포는 초익공으로 쇠서를 둥글게 가공한 몰익공 type을 적용했니다. 전면에 1개의 고주를 세운 1 고주 5 량가 건물이다. 



‘비현(丕顯)’은 (1)‘덕을 크게 밝히다’ (2)‘크게 드러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비(丕)’는 ‘크다’는 뜻이고 ‘현(顯)’은 ‘밝다’ ‘드러나다’는 뜻이다. 현판은 1999년에 설치했고, 오옥진이 쓰고 새겼다. ‘비(丕)’자는 옛 서법을 따라서 썼기 때문에 정자체와는 차이가 있다.


천장에 우물 반자가 설치돼 있고, 바닥에는 우물마루가 설치됐다. 온돌방과 대청 사이에는 불발기창이 있고, 뒷면으로 세살 분합문을 두었다. 대청 전면 내진 고주열에는 들어 열개 창을 설치해 대청 공간을 개방할 수 있도록 했다.


온돌방 내부에는 세자가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이 들여져 있다. 조선왕조의 세자들은 숨 막히는 '공부방'에 갇힌 듯이 살았던 존재들일 런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성에 대한 풀이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는지 모르고, 그런 관행 때문에 젊은 나이에 요절한 왕이 많이 배출(?)됐던 것인지도 모른다. 


# 이극문(貳極門)



이극문(貳極門)은 경복궁 비현각(丕顯閣)의 동쪽 행각이 남쪽으로 뻗어 마무리되는 지점에 놓인 2칸의 문으로 동향으로 서 있다. 이극(貳極)이라는 말은 동궁과 연관됐다. 이극이란 '두 번째 북극'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임금이 북극성이고 세자는 북극성 자리를 이를 후계자이므로 이극이라 불렸다. 비현각의 동쪽 행각은 줄행랑이라 불렸고 방문객의 이용 장소로 사용됐던 곳이라고 한다. 


# 구현문(求賢門)



이극문을 나가 소주방 쪽으로 난 동쪽 행랑을 따라 올라가면 또 하나의 일각문이 나온다. 구현문이다. 비현각의 내행각과 외행각이 이루는 가운데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동문으로 '구현(求賢)'은 '현자(인재)를 구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차기 왕권을 이어받은 후사에 대한 희망을 담은 작명으로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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