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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독도의날 121주년을 맞이 3] '독도와 안용복'
  • 이근봉/천지개벽TV 대표
  • 등록 2021-10-24 1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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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은 1690년 숙종 때 인물로 일본에게 공식적인 조선의 독도 영유권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안용복은 생애가 미천한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사노비 출신 안용복이 해낸 것이 독도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용복은 부산의 동래에서 태어나서 좌천동 인근에 살면서 수군에서 군역을 했던 것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를 조금 했다고 합니다.


1693년 능로군으로 군역을 마친 그는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에서 전복을 따면서 일본의 오타니 가문의 어부들과 자주 부딪쳤습니다. 당시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호통을 치고 항의해 봤지만 결국 일본 오카시마로 납치 되었습니다. 안용복의 1차 도항 때 안용복 나이가 36살, 숙종 19년 1693년 3월 18일입니다. 


안용복이 일본에 붙잡혀 갔을 당시에 호카슈지방의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안용복의 거세고 논리적인 반발에 밀린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 해 막부의 판단과 신병처리를 물었습니다. 막부의 회신은 5월에 도착했습니다. 막부는 안용복등을 나가사키로 이송을 지시하면서 울릉도 영토가 아니다. 울릉도비일본계라는 내용 서계 써주게 하고 안용복도 풀어주고 일본 어부들에게 독도 부근에 가서 고기를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용복 1차 서계를 받아옵니다. 도쿠와 막부 정부로부터 안용복은 배짱과 타고난 논리로 외교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안용복은 1696년(숙종22년) 제2차 도항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그 일개 평민 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밝히는 놀라운 일반 외교를 펼쳤던 것입니다.*참고-안용복의 도일활동은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동국문헌비고, 기타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 2차 일본에 건너갈 때는 3월 조선어민을 대거 이끌고 갔습니다. 인용복은 32척의 배를 동원했고 160명이 되는 규모입니다. 그리고 그는 울릉우산양도관세관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준비한 관복을 입어 정식 관원처럼 행사했습니다. 물론 가짜였습니다. 자기 임의대로 만들어서 한 행위로 훗날 알게 되어 귀향살이도 합니다. 조금 있다 업적이 훌륭하여 바로 풀려났습니다.


안용복은 1차때 1693년에 일본에 가서 서계를 받아오고 2차때 1696년에 다시 서계를 받고 다시는 울릉도 독도에 가서 고기를 잡지 말라고 일본정부에서 어부들에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울릉도 독도는 조선 땅이라고 그들은 이용복에게 서계를 두 번이나 써주고 많은 역사책, 지리책에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로 나와 있고, 국제법상으로도 지배하고 있는 한국 영토가 맞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1904년~1905년전 러일 전쟁 전에는 독도를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905년 러일 전쟁을 하면서 지리적으로 좋다는 것을 알고서 계속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말하면서 일본에 가서 서계를 두 번이나 받아온 안용복은 독도의 영웅이고 울릉도와 부산 수영공원에 안용복 동산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터 독도의 중요성을 알고 잘 지키고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독도에 이야기 할 시간이 온다면 역사문헌만 일본에게 발표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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