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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국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 발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9-24 00: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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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따라서 중국이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는 한국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중국의 고대사 만들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이영호)은 고대사 만들기와 중국의 애국주의 강화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로 '중국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를 발간했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건의 발생 원인을 역사허무주의와 민족허무주의의 잘못된 사상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역사허무주의는 중국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민족허무주의는 중국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정부는 역사허무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비판하고 애국주의를 강화키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고대사는 애국주의 역사 프로젝트의 핵심 주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고국이라는 타이틀은 애국주의 강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존재했던 구체적인 연대를 증명하는 프로젝트였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중화문명의 시원을 찾는 공정으로 하상주 이전의 신화시대를 역사시대로 만들고자 했다. 이번 연구의 대상인 염제, 황제, 요임금은 중화문명탐원공정의 대상이고, 우임금은 하상주단대공정의 대상이었다.


신화상의 인물을 역사적 인물로 바꾸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했다. 문헌상의 기록과 유사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면 '누구의 도읍지다' '누구의 출생지다'라고 결론 내렸다. 문헌 기록과 실제 고고 유적 사이에 존재하는 수천 년의 시간적 거리는 문제되지 않았다. 문헌 기록 중 유리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무시했다.


염제와 황제에게 역사허무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극복할 의무가 주어졌다. 역사허무주의 극복을 위해 연구자들은 염제, 황제의 흔적을 찾았는데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5,500년 경 신석기 중기 유적이고 가장 늦은 것은 기원전 1,900년경 청동기 초기 유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염제, 황제 유적은 중국 남부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서 발견되면서, 시간적으로도 3,600년의 역사를 포괄한다. 염제와 황제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이처럼 다양한 지역에서 3,6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생존할 수 없으니 염제와 황제의 역사화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염제와 황제에게 부여된 임무는 역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민족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중화민족의 공통 조상으로서 중화민족을 통합할 의무도 부여받았다. 중국 각지에서는 염제와 황제의 조각상과 사당이 증축, 건립되고 대규모 의례를 거행하기 위한 제전도 개최됐다. 허난성의 황제고리와 산시성(山西省)의 황제릉에는 각종 정치적인 표어가 전시되고, 제왕의 기념일에는 유력 정치인들이 참여해 중화민족의 통합을 독려했다.


요임금과 우임금은 염제와 황제에 비해 후대의 인물로 인식되기 때문에 주로 역사허무주의 비판에 동원됐다. 요임금과 우임금의 흔적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찾았다. 두 임금의 실존을 증명하는 유적으로 제시된 것은 타오쓰(陶寺, 기원전 2,300년~기원전 1,900년) 유적과 얼리터우(二里頭, 기원전 1,800년~기원전 1,500년) 유적이다. 


이들 유적은 궁성, 성곽, 계급의 분화, 청동기 사용을 보여 주어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들 두 유적 또한 요임금과 우임금의 궁성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문자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해당 유적이 두 임금의 도읍지였음을 증명할 수 없었다.


현재까지 이뤄진 중국의 고대사 연구를 종합하면 염제는 문명의 시조이고, 황제는 제왕의 시조다. 요임금 시기 ‘중국’ 개념이 처음 등장했고, 우임금 시기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가 건립됐다. 


고문헌 기록에 의하면 염제와 황제는 전국시대 기록에 처음 등장하고, 요임금은 춘추시기, 우임금은 서주시기 금문에 등장한다. 의고(疑古)학파가 지적한 바와 같이 늦은 시기 문헌에 등장하는 제왕들이 더 이른 시기 역사적 인물이 됐다.


총체적으로 뭔가 자꾸 중복되고, 논리에 맞지 않는 느낌이 있다. 이는 전설상의 인물을 역사화 하는 과정에 발생한 오류다. 황제가 제왕의 시조라면 당연히 황제 시기 국가가 성립돼야 하나, 요임금 시기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했고 최초로 중국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다시 우임금 때 최초의 중국 왕조인 하나라가 건립됐다고 한다. 중국 고고학이 지나치게 역사를 중시하는 현상, 즉 역사의 과잉이 초래한 오류다. 따라서 중국의 고대사 만들기는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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