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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16] 핏빛 슬픈추억을 건직한 꽃, '석산(石蒜)'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9-05 18:22:02
  • 수정 2024-03-23 00: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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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중심에서는 ‘석산(=꽃무릇)’이 그리워진다. 

진한 붉은 빛을 머금고 단정하게 헝클어진 꽃도 그립고, 그것을 바치고 선 휘청거리는 가녀린 줄기가 안타까우면서 그 역시 그립다. 

숲 속 어딘가 그늘에 쉬는 듯한, 그러다 빛 한줄기 비춘다면 환하게 웃으며 맑게 떠오르는 잊어야 할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모습이다. 꽃무릇, 석산의 모습이 유독 그러하다. 


스님의 이루질 수 없는 연인의 전설이 있는가 하면, 핏빛의 꽃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슬픔을 간직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석산은 유독 절집 주위에 많이도 피어난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경지에 이르고 싶은 마음일까, ‘피안화彼岸花’라고도 불린다. 

 


석산은 추석 전후로 만개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이다. 

서울에서 석산을 만나기 위해서는 좀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데, 석산이 추위에 약하여 중부지방에서는 자생할 수 없는 이유다. 


석산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상사화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름이 틀린 것은 아니다. 상사화와 마찬가지로 꽃과 잎이 서로 등지고 있어 바라볼 수 없는 것이 같다. 다만 석산은 붉은색의 띄고, 상사화는 붉은빛에 보랏빛, 또는 분홍, 노랑이 더해진다. 


상사화의 꽃말은 ‘참사랑’, 석산은 ‘슬픈 추억’이다. 

 

O 모악산 용천사(母岳山 龍泉寺)


절집 대웅전의 아래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용이 살다가 서해로 나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샘의 이름이 ‘용천’이라 하며 절집의 이름이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백양사의 말사다.


기원전 600년(백제무왕1) 행은(幸恩)이 창건하였고, 645년(의자왕5)에 각진(覺眞)이 중수하였다. 1275년(고려 충렬왕1)에 국사였던 각적(覺積)이 중수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중수가 이어지면서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기도 하는 대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1964년 대웅전을 새로 세우면서 중수를 거듭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용천사에는 용천사 석등(龍泉寺 石燈, 전남유형문화재 제84호)이 있다. 간석 8각 전면에 ‘康熙二十四年乙丑六月日(강희24년을축6월일)’이 음각되어 있어 1685년(숙종11)에 조성 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해시계’가 있는데, 39cm의 정사각향에 14cm의 높이였으나, 한국전쟁의 난리 속에 사라졌다가 1980년 절집 주변 흙더미에서 발견 된 것으로 현재는 절반이 사라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용천사에는 셰계 최대 규모라 할 만큼의 석산 군락을 이룬다. 꽃무릇이 핀 모습을 ‘한국100경’에도 소개 된 바 있는 곳으로, 절집의 들머리 산마루에 드넓게 펼쳐지고, 절집의 뒤편 야생차밭과 대나무 숲 속에도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장관을 보여준다.

 


O불갑산 불갑사(佛甲山 佛甲寺)


삼국시대 백제에 처음 불교를 들여온 인도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84년(백제 침류왕1)에 창건한 절집으로, 이 절이 백제불교의 시작으로 으뜸이 된다하여 ‘불갑사(佛甲寺)’라 하였다.

창건 이래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각진국사가 머물면서 절집의 위세가 더해졌으나,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고 1680년(숙종6) 중건한 뒤 지금에 이른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백양사의 말사다.



불갑사의 눈에 띄는 것은 3.5m의 키를 가진 사천왕상이다. 1870년(고종7), 설두선사가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신라 고승 연기조사가 목각했다고 전하는 거상巨像의 사천왕상을 모셔왔다. 

당시 고창 현감이 풍수가의 말을 듣고는 고창 소요산에 있던 연기사를 불 질러 없애고 자신의 집을 지었는데, 다행히 사천왕상은 그대로 남아있었으니, 나무배 4척을 동원해 법성포를 통해 불갑사에 모셔진 것이다. 


불갑사 창건 당시 인도스님의 행적과 같은 방향으로 절집에 당도하게 된 묘한 인연이 있는 사천왕상이다.

 


불갑사에는 초여름부터 상사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상사화가 지고 나면 석산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일면 ‘레드라인’이라 불리는 석산 군락이다.


이미 주차장부터 시작된 붉은 빛의 잔치가 야단법석이다. 

흐드러진 붉은 빛은 바람을 만나 제 멋대로 춤을 추어댄다. 속눈썹 깊고 길게 뽑아낸 모습이 영락없는 무희의 형상이다.

일주문을 지나고 나서도 거대한 석산 군락지는 끝없이 이어진다. 꽃밭사이로는 황토 길을 놓았고, 부도 밭 근처로도 양탄자를 깔아놓은 모습이다. 

 


O도솔산 선운사(兜率山 禪雲寺)


고찬 도솔산 북쪽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다. 

577년(백제 위덕왕24)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그러나 800년의 흔적은 사라지고 퇴락한 선운사를 1354년(고려 공민왕3) 효정 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1473년(성종4)에 들어서야 행호 극유 스님이 왕실에 선운사 중창의 뜻을 알렸고, 덕원군(德源郡 李曙, 1449~1498)이 이를 승낙하였고 1483년(성종14)에 완공에 이르러 어실(御室)을 비롯한 백여덟 칸의 대찰이 되었다. 이 후 매년 어실에서 법회를 열어 왕실과 열성조의 명복을 기원하였다. 

그러던 1597년(선조30)의 정유재란을 선운사도 피해가지 못했다. 어실을 제외한 모든 가람이 소실되었다. 



이 후 승려들이 모여 선방을 만들어 지내다가 3칸의 법당을 완성했으며, 선사들과 민초들의 도움으로 불사가 계속되니 선운사는 누구 하나의 이름이 아닌 대주 260여명의 이름이 1698년 선운사중신기禪雲寺中新記에 기록되었다. 

이러한 중수는 1707년(숙종33)까지 이어졌다. 


창건주 검단선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물며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의 ‘선운사禪雲寺’라고 말했다. 

집결된 하나가 아닌 여럿이 마음을 모아 이룬 대찰의 면모를 이름대로 보여준 것이다. 민초들의 정성과 마음이 녹아있는 절집은 대찰임에도 포근하고 여유롭다.

 


절집이 자리한 선운산은 ‘도솔산’으로도 불린다.

경내를 스치듯 흘러내리는 맑고 찬 도솔천을 따라 석산이 자리한다. 대단한 군락을 이루는 공간은 아니지만 검소한 선운사 석산의 모습이 길손의 눈에는 가장 평화롭다. 


화려하지 않다. 소박하다. 소란스럽지 않다. 넉넉하다. 

산문 밖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는 공간의 정적에서 석산은 그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붉은 빛에 간직한 아리고 아린 슬픈 추억을 간직한 석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만 해도 수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모두 비슷하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더하여 스님의 이야기다. 

어찌 핏빛의 꽃에 스님의 사랑가를 넣을 수 있겠냐만, 애증은 석산의 꽃잎이 가진 운명이었다. 


지금 이 시대, 소리 없이 다녀가는 걸음을 석산은 말없이 반길 것이다. 

그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부디 이미 아픔을 간직한 석산을 밟고 꺾지 마시길..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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