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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6] '태백산맥' 소설 속 길을 걷다. - 보성 벌교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3-29 13:08:05
  • 수정 2024-03-23 00: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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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것, 신기로울것 없는 벌교,

오히려 그러한 낯익음이 반가운 곳이다.

 

갯내음과 산내음이

바다를 건너오고, 산을 타고 넘으니 벌교다.

 

어느 순간부터 왜놈알기를 주먹하나로 원숭이로 보이게 한 작은 마을,

그 마을에서는 지금도 피 끓는 젊음이 보인다. 꿈틀거린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던 시대,

부끄러워 지우지 않고 대놓고 목놓아 운다.

벌교사람들은 그만큼 진솔하다.


태백산맥문학관 > 현부자집 > 소화네집 > 부용교(소화다리) > 김범우의 집 > 

홍교(횡갯다리) > 용연사(M1고지) > 농민상담소(옛 금융조합) > 남도여관 > 국일식당(옛 술도가) > 대창기계(옛 솥공장) > 벌교역 > 중도방죽 > 벌교꼬막집 

 ※사진의 설명자료는 '태백산맥문학관' 홈페이지의 내용을 옮긴것임을 밝힘니다. 


1.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2008년 11월에 개관한 문학관으로 일명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의 시작이 되는 곳이다. 

작가 조정래부터 태백산맥이 완성되까지의 과정등을 상세하게 안내하고, 당시의 벌교, 인근의 상황등도 함께 기획, 전시하고 있다


이가 시리도록 차던 바람은 어느새 창을 열고 가슴으로 받아도 좋을 만큼 시원해졌다. 자연의 시간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조용히 다가왔다. 


봄이다! 아직은 이른 서투른 봄이지만 코끝의 바람 향과 맑게 비추어지는 바다의 일렁거림은 이내 봄이 오고 있음을 몸뚱이에 알린다. 그토록 무딘 몸, 겨우내 꼭꼭 숨겨두기만 했던 것들은 이제 하나씩 꺼풀을 벗겨 놓는다. 


계절은 시간에 맞추어 흘러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느긋하게 만든다. 자연이 만들어 주는 시간에 맞춰진 사람의 시간의 오묘한 조합은 작은 땅 벌교에도 찾아왔다. 

 

전라남도 보성, 그곳에서도 남해바다를 따르다가 제석산의 끄트머리에서 순천과 벌교를 나누며 늘어지게 서 있는 곳, 그 앞이 벌교다. 크지도 않은 이 땅에 거대한 소설 하나가 묻혀 있다.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 

4년여의 자료조사와 6년간의 집필기간에 16,500매에 이르는 집필원고의 소설은 1983년 9월호 월간지 ‘현대문학’에 처음으로 연재가 된다. 작가는 소설 속에 파 묻혀 살며 1986년 제1부, 전3권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제2부, 전2권, 그 다음해에 제3부, 전3권을 그리고 1989년 제4부, 전3권을 출간함으로서 총4부작 전10권의 대하소설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2. 현부자집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태백산맥 1권 14쪽)」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집과 뒤로 제각이 자리한다. 


‘태백산맥(太白山脈)’ 


그 곳은 어디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태백산맥’이란, 강원도 원산에서 부산에 이르는 약500km의 구간을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郎, 1856~1935)’가 개인의 자격으로 조선을 여행하며 ‘한반도의 땅 모양은 토끼를 닮았다.’라며 내세운 주장의 일부분이었다. 1903년에 말 4마리에 짐을 싣고 인부 6명을 데리고 1년 2개월 만에 만들어진 결과로 우리는 그동안 그릇되게 만들어진 일본 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것을 교과서에 수록하고 그대로 배워 왔던 것이다. 


그러던 2005년 국토연구원의 실측 결과 백두산에서 금강산,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장장 1,494.3km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밝혀냈다. 100년 넘게 교과서에 수록되어 배워 온 산맥의 개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동안 우리가 외운 이름들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차령, 노령산맥이라는 이름들, 알고 보니 이 이름들의 지형은 언덕에 가까운 것들이다. 즉 산맥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바로는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이 끓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모두 하나의 산맥으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 뒤늦은 결과의 확인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밝혀진 것에 대해 다행스러울 뿐이다.


결국 일제는 고의적으로 단결을 훼손하려했다. 일체적인 요소를 없애고 이분적 논란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국토의 왜곡, 문화전통의 상실, 역사의 훼손을 위한 것이며, 또한 당시의 현실적인 이유로 식민지 지하자원의 수탈을 염두에 둔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암튼, 동시대에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알고 왔기에 그냥 태백산맥이라 하자. 

그런데 실제 소설의 무대는 태백산맥과는 거리가 있는 땅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소설 속 무대 ‘벌교’의 위치는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하고 그 중간에 영취산에서 빠져나온 2차 산맥으로 무등산에서 백운산으로 빠지며 광주를 감싸 안는 호남정맥의 끄트머리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3. 소화의 집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태백산맥 1권 17쪽)」 

소설에 나오는 무당 소화네 집의 모습이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 안의 앞터에 있었다.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 숲이 집을 보듬듯하고 있었다. 


4. 소화다리(부용교芙蓉橋)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태백산맥 1권 66쪽)」

1931년 6월(단기 4264년)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소설에서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으로 그때의 처참상을 상상하면 다리가 달리 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소설의 제목을 ‘태백산맥’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반도의 척추가 잘려나간 현장을 말하는 것이며, 민족분단의 비극을 말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로 짐작된다. 1948년 당시의 ‘벌교‘라는 작은 땅에는 수많은 죽음과 희생, 이념의 대립으로 불행했던 우리의 시대를 암울하게 그려 나가면서 개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얽히고설켜 가슴속에는 보이지 않는 담이 쌓이고, 언덕을 이루고 급기야 거대한 산맥을 이루는 비참하고 잔혹한 삶의 모습을 그려냈다.

 

5. 김범우의 집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볽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허겄는가. 맘 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태백산맥 1권 141쪽)」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집안 소유의 집이다.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랫채에서 초등학생이었던 작가가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는 것은 작은 흥미를 일으킨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현재는 관리의 부재인지 훼손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안쪽에는 실제 거주하는 분이 계시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趙廷來, 1943~)’가 태어난 곳은 전남 승주군, 지금의 순천군 선암사(仙岩寺)다. 


어린 시절을 벌교에서 보내고 광주 서중, 서울 보성고를 거쳐 동국대학교를 다니면서 지금의 부인 ‘김초혜(金初蕙, 1943~)’시인을 만나 평생가약을 맺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 벌교에서 자라며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소설로 써 내려갔다. 사실상 소설 태백산맥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넌픽션(Nonficton)이다. 이전세대의 아픔을 들었고, 후유증을 보고자란 작가 자신의 경험담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 소설의 줄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은 다분히 이념 대립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이유로 1994년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와 자유총연맹등의 반공단체들이 ‘이적성을 내포한 소설’로 규정하며 ‘국가 보안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 되었고, 사건은 지지부진 하다가 11년만인 2005년 ‘무혐의‘로 처분 된다.

 

 6. 횡갯다리(홍교, 보물 제304호)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7쪽)」

홍교는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서기 1728(영조4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보시로 홍교를 건립했다.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벌교(筏橋 :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 지음)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뗏목다리'로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1994년은 소설이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하던 때다. 


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오정혜등의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 ‘태백산맥’이 개봉되던 때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시대적인 압력에 의해 소설과는 달리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간다.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는 영화의 큰 틀마저 건들게 된다. 흔치 않았던 총 2시간 45분여의 장편영화이지만 메시지 전달에만 주력 하였을 뿐, ‘태백산맥’속에 흐르고 있는 자체의 틀은 제시조차 하지 못했다.


이 후 소설 ‘태백산맥’은 승승장구하며 200쇄를 넘어서고 700만부 이상을 팔아치웠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장 추천하고 싶은 도서’, ‘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등 80~90년대 어지간한 분야에서 모두 1위를 휩쓸어버리는 기염을 토해낸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염상진)


“사람을 수단으로 삼고 사람간의 증오에 토대를 하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사상도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김범우)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다.

 

7. 용연사(M1고지)

소설에서 책방 주인이며 세포책인 문기수가 야산대장 염상진의 ‘최후의 명령’을 접수하기 위해 불공드리는 신도로 위장하고 용연사로 향하는 대목이 그려지고 있다. 저 멀리 고읍들 끝의 금전산에서부터 이어지는 야산줄기는 부용산에서 끝나는데, 그 긴 산줄기와 야산대들이 암약하기 좋은 루트가 되었다. 용연사는 1910년 무렵에 개창되었다. 그 이전에 부용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만들어진 슬프고 서러운 노래 「부용산」을 탄생시킨 부용산은 벌교 시가지와 가장 가까운 산으로 그 끝자락이 시가지에 닿아 있다. 그 산의 칠부 능선쯤에 자리잡은 용연사에서 바라보는 동쪽 먼 포구의 풍광은 일품이다. 


8. 금융조합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理財)솜씨는 멋 부리는 것 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백산맥 1권 284쪽)」 

송기묵은 돈을 다루는 사람답게 치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에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해주고 있다.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 잡아 고객들의 편리를 최대로 도모한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은 


1948년 1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앞 둔 시점으로 너무도 일상적인 고요속의 풍전등화와도 같은 풍경의 ‘벌교’에서 시작하여, 1953년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가는 늦가을, 5년간 악몽의 태풍이 할퀴고 풍경의 ‘벌교’에서 끝난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만주, 서울, 부산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영화 속에서는 시종일관 벌교에서 시작하여 벌교에서 끝이 난다. 

 

해방 이후, 일제36년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좌파와 우파의 사상대립이 심각해지고,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면서 지주계층과 소작농계급으로 분리가 되었다. 이들의 뿌리 깊은 갈등이 소설의 시작이다. 정부의 토지대책에 기대를 걸었던 소작농들은 늦어지는 농지개혁에 지쳐가고, 지주들은 농지를 편법으로 처분하려 한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과 지주들의 틈을 ‘빨치산’이 비집고 들어가게 된다. 


땅으로 인한 갈등은 사상이나 이념조차의 개념조차 서지 않은 농민들을 회유 하였고,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고 빨치산이 된다.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빨치산의 생각과 달리 인민군들은 공산주의 혁명세력으로서 다시금 피바람을 몰고 오게 되는데, 이것이 벌교를 주 무대로 한 소설의 틀이라 할 수 있다.

 

9. 남도여관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태백산맥 3권 85쪽)」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소설에서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한다

 역사는 문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유물을 보았을 때 설명이 필요 없이 지난 시대를 한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수난과 고통의 역사일수록 그 시대의 유물은 남겨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이 2층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거리로 소위 본정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10. 국일식당(술도가)

소설에서 정현동의 술도가로 묘사된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삼성주조장이라는 술도가가 있었으나 소설 속의 묘사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촌부자 술도가 하고 정미소 빼면 없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50~60년대의 사회현실이기도 했다. 

작가는 이 점을 포착하여 정현동이라는 현실주의적인 인간상을 창조하는 한편 그와 대비시켜 그의 아들 정하섭을 배치함으로써 이념의 차이가 부자간에 어떻게 작용하며, 그것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섬세하게 그려내 인간의 삶의 다층성과 애증의복잡성을 실감있게 느끼게 해준다. 정현동이 술도가를손에 넣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그가 논에 바닷물을 채우다가 죽게 되기까지 가지가지 삶의 행태에서는 필연적인 역사성과 사회성의 고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 발견이 소설의 바른 읽기 일 것이다.


11. 대창기계상사 (옛 솥공장)


일제가 식민지화의 기틀을 만들고자 시작한 토지조사,


그 틀 속에 농민들의 땅을 약탈하여 대부분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또한 그 소작농들의 대부분이 가난으로 굶주리게 된다. 그런 와중에 친일파들은 일본에게 협조하면서 자신들만의 부를 쌓아가게 된다. 그리고 해방, 북쪽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두었으나, 남쪽에서는 (친일파)지주들의 반발로 농지개혁 자체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친일청산에 의도적으로 실패한 정부로 인하여 지주와 소작농들의 갈등이 이어지고, 그 갈등의 사이를 좌익이 파고들게 된다. 이로서 사상이나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들은 좌익에 동조를 하게 만든다. 논 대신 산을 택하였고, 쟁기 대신 총을 들게 된다. 그리하여 먹고 살고자 하는 단순한 농민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순수하고 소탈한 사람들의 삶이 일순간 전쟁터로 바뀌는 순간이다. 


전국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간직한 남도의 땅, 그 중에서도 알토란과도 같은 ‘벌교‘가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이유다.

 

영화와 소설 ‘태백산맥’을 만난 지 20년, 여행자는 벌교를 찾았다. 


소설과 영화의 주 무대다. 벌교를 여행하며 소설속의 길을 걷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갈등 속에서 죽어 간 땅, 낮에는 국군의 땅, 밤에는 빨치산의 땅, 하루해가 지나면 나도 모르게 빨갱이가 되었고, 다음날이면 주검이 되었다. 좌파와 우파, 흑과 백의 논리만이 서슬 퍼렇던 시간, 지금은 한 없이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차분함이 넘치는 벌교다. 


이제는 천천히 걸으며 소설속의 무대를 찾아가 본다. 

 

12. 벌교역

소설에서 벌교역은 여러 가지 행사와 사건들이 벌어진다. 국회의원 최익달을 전송하는 유지들의 도열, 후임 계엄사령관 백남식의 떠들썩하고 허풍스런 부임, 손승호가 이끄는 데모대의 항의 시위, 양효석의 금의환향,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 이란 큼직한 글씨와 함께 그의 목을 역의 앞마당에 사흘간이나 내걸었던 일, 그리고 염상구가 삐딱하게 틀어돌린 어깨를 흔들며 건들대는 모습 등..

일본식의 소규모 역들이 으레 그렇듯 벌교역도 스무평 남짓한 대합실과 그만한 넓이의 사무실이 갖추어진 아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노후로 1987년에 지금의 새 역사가 건립되었다. 벌교역은 유난히 시가지와 가깝고 시외버스 차부까지 인접해 있는데다 널찍한 마당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 주변은 상가들이 번창한 생활의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3. 중도방죽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恨)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쨌겄소. (태백산맥 4권 306쪽)」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中島, 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 방죽의 이름이다. 중도라는 사람은 일제강점기 실존인물로, 철다리 옆에 있는 마을에 살았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뼈 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들판을 한스럽게 바라보면서 방 노인이 자신에게 했던 얘기를 되새겨가며 이지숙은 일부러 방죽을 걸어 선수머리까지 갔다가 되짚어 돌아온다.


14. 벌교꼬막집

벌교 일대에는 유명한 꼬막집들이 많다. 알 꽉찬 실한 꼬막들의 입맛을 살린다. 어느 식당으로 들어서도 남도의 푸집한 꼬막 상차림을 만날수 있다.


270명에 이르는 방대한 등장인물들의 삶이 엉킨 공간, 벌교.


그동안 벌교는 변했다. 많이도 아닌 작은 변화, 예전의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뒤엉켜 읍내를 형성하고, 가장 빠르고 새로움을 더하는 벌교역이 깔끔 떨며 자리에 서있다. 


소설 속, 영화 속에서 이미 사라진 풍경이 있으며, 존재만이 남아 있는 풍경이 있으며, 아예 소설 속의 무대로 들어가 더 가까운 채비를 마친 자리도 있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으로 둘러보는 소설속의 길이지만, 평화로움 가득한 벌교 땅의 모습이다. 아귀다툼의 흔적은 지워진지 오래다. 이토록 잔잔하고 조용한 땅임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보다는 소설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의미로만 두면 좋은 여행이다. 소란스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해지는 벌교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방죽에 서서 일부러라도 훌훌 털어내어 본다. 

 

때려도 아픈 것이고, 맞아도 아픈 것이다.


애쓴 흔적이 부드럽지 못하더라도 바람에 부대끼는 갈대의 숨소리에 귀를 세운다. 계절의 옷을 입은 바람이 부드럽다. 귓가를 스치는 부드러움, 연한 잠에 취하고 싶어진다. 


벌교는 그런 땅이다./글.사진-박성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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