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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3] 강릉 문화답사 2> 강릉의 당간지주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2-18 12:13:16
  • 수정 2024-03-23 0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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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움의 기억 속 돌기둥들의 운둔,

‘강릉시 당간지주’

 

강릉 문화답사 1> 강릉의 당간지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고,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기르기 좋으니 도읍으로 적당하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 강릉을 말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강(하천)과 땅(기슭)의 조화가 적당하다.”하여 259년(고구려 중천왕12)에는 ‘하슬라(何瑟羅)’로 불렸다.


뿌리 깊은 역사를 간직한 땅에서는 긴 시간만큼의 역사와 문화를 지금까지 이어왔다. 오늘도 옛것을 지키고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의 마음엔 예향으로 이 땅을 사랑한다. 그들이 있어 강릉은 현재와 과거가, 지켜나가려는 것과 새로운 것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야기가 있는 도시다. 그 땅의 오늘은 여전히 과거와 이어진다. 매력이 넘치는 강릉이다. 하여 돌과 나무, 아무렇게 돋아난 새싹의 시간도 역사가 될 것 같다. 


다시 보이는 자연이 코로나19로 인한 팬더믹 시국에 더욱 반갑다. 오롯이 홀로만의 답사여행인지라 여유 있어 더 좋다.

 

봄날이다.


예전의 어느 봄날과 같다면 화창하기만 한 날씨의 이 길이 오늘 같지 않으리라, 지난 2년의 봄은 모두가 힘들고 지치는 ‘어느 봄’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음은 답답하지만 강릉으로 가는 길은 푸르다. 사람이 통제와 자제에 익숙해져가니 자연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다. 하늘과 바다가 푸르고, 산과 들이 연두색이다. 푸른 날이 아름다운 날, 길손은 강릉 땅으로 들어섰다.

 

오늘의 것과 옛것이 어울려 살아 숨 쉬는 땅에서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당간지주’다.

‘당간지주’는 당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사찰의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며 보통 절집의 앞에 설치되었다.


부처의 공덕과 위신을 기릴 때 높게 ‘간(竿:장대)’을 세우고, 불교 용구인 ‘당(幢:불화가 그려진 기)’을 달아두는데 장대와 깃발을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하게 해주는 돌기둥(또는 철제, 금동, 목제)을 ‘지주(支柱)’라 한다. 이를 합쳐 ‘당간지주(幢竿支柱)’라 부른다.


아래로는 깃대받침인 ‘기단(基壇)’이 자리하고, 지주에는 ‘선문(線文:선문자)’이나 ‘돌대(突帶:띠무늬)’로 장식을 하고 맨 위의 ‘사분원(四分圓)’에 한 단의 굴곡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당간지주 각각 두 곳에 두 기둥이 서로 통하도록 구멍을 뚫는다. 이를 ‘간공(杆孔)’이라 하는데 긴 기둥을 당간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보이지만 대부분 위, 아래 두 곳에 마련되어 위쪽에 간을 시설하고, 아래쪽은 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당간지주들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고려시대의 것으로 그 이전의 당간지주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려함과 유려한 기술을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육중하면서 거친 무늬와 형식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작거나 낮았으며 조식(彫飾)이 없는 목조의 당간을 세우거나 기존에 있던 당간을 보수하는 정도로 흔적만이 남아있다. 


강릉의 당간지주도 비슷한 연대의 것들이다. 텅 빈 절터에 횡 하니 선 우람한 돌기둥도 있고, 도심의 한 가운데서 보호받으며 서있기도, 때론 마을의 어느 한 필지에 소박하게 서 있기도 하다.

 

●굴산사지 당간지주(崛山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86호)



강릉 나들목을 빠져나와 커피공장으로 향하다 왼쪽으로 논밭의 평야가 펼쳐진다. 마을을 관통하는 국도를 따라 사방이 모두 옛 굴산사의 터다.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을을 시작하는 곳에서 산 아래까지 굴산사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제는 사지만 남아 옛 영화로움을 기억하는 공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돌기둥이 시간과 마주하며 너른 들판을 기억으로 내려 보고 서있다.

 

사적 제488호 ‘굴산사(崛山寺)’지는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 ‘사굴산파(闍崛山派)’의 총본산인 굴산사(崛山寺)가 있던 터다.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았으며, 현재 강릉지역에서는 신격화 된 존재로 ‘대관령 국사서낭신(大關嶺 國師城隍神)’으로 모셔져 단오 때 제사를 모시고 있는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 810~889)’이 847년(문성왕9)에 세운 절집이다. 


고려시대 들어 크게 번창하였으나 언제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그러나 당간지주와 부도, 석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상, 좌대 등의 관련 유물들을 보면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큰절의 터와 떨어진 벌판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당간지주가 우뚝 서있다. 높이 5.4m로 지주가 하나의 돌로 된 거대한 화강암이다. 깃대는 사라지고, 지주만 남았으며, 아래쪽은 땅에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의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당간지주와 달리 장식이 없는 소박한 가공으로 지주 사면에 아무런 조각이 없는 평면으로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정자국도 그대로 남아있다. 남측 지주 꼭대기에 약간의 파손이 있으며, 정상의 끝은 뾰족하다. 전체적으로 소박하지만 웅장하다.

 


하늘을 덮고 서 있는 돌기둥은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있으나 내 뱉지 않는다.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 어제는 영화로웠으니 오늘은 편하게 쉬고 있다. 

 

 ●대창리 당간지주(大昌里 幢竿支柱, 보물 제82호)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다.


강릉 동부시장의 주변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이곳도 코로나로 인하여 부자연스럽다. 반면, 한산한 길목 보호울타리 속에서 화분처럼 서 있는 돌기둥은 마음씨 좋은 아가씨가 선 듯, 그 모습이 다소곳하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당간지주로 과거 옥천동 일대 ‘용지사(龍池寺)’, ‘무진사(無盡寺)’의 터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인근에서 석조여래입상과 여래좌상, 팔부신장 암각 등이 발견되어 강릉시립박물관에 옮겼다고 하니 예의 오래 전 어제에는 일대가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창리 당간지주’는 높이 5.1m의 두 돌기둥으로, 남북으로 서로 1m 정도의 사이를 두고 있다. 지주 정상은 바깥쪽으로 곡선으로 깎아내려 부드러워 보이며, 바깥면의 양쪽 모서리를 깎아서 간결해 보인다. 지주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아 소박하고 단아하다.


깃대를 고정시키는 구멍이 없는 대신 정상부 안쪽으로 ㄷ자형의 홈을 내어 깃대를 고정 할 

수 있도록 했다. 시대의 짐작으로 외형이 경주 망덕사지당간지주와 비슷하여 8세기경 작품으로 보고 있다.

 


단아한 대창리 당간지주는 다소곳하고 여린 모습을 보인다. 부드럽게 깎여진 돌기둥에서 부끄러워 고개 숙인 아가씨의 모습이 스친다. 


길손의 눈에 보이는 대창리 당간지주는 젊은 총각을 만난 홍조를 가진 처자였다. 그를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 총각을 만나러 갈 차례다.

 

●수문리 당간지주(水門里 幢竿支柱, 보물 제83호)



젊은 총각 같은 당간지주, ‘수문리 당간지주’다. 남대천을 동남으로 두고 옥천초등학교의 옆구리에 자리하고 있다. 다소곳한 도시 아가씨와 같은 대창리 당간지주와 달리 높지 않은 민가에 서 있다. 야트막한 보호 울타리로 감싸고 너른 잔디밭에 무뚝뚝하게 서 있다. 소박함 역시 아가씨 돌기둥 못지않다. 

 

대창리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3.4m로 서로 1m의 간격을 두고 서있다. 안과 밖으로 사면 모두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소한 양식이지만,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곡선을 깎아내어 유려한 모습이다. 안쪽에는 간을 걸쳤던 ㄷ자형의 홈이 파여 있다. 기단은 흙에 묻혀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그 모습은 대창리 아가씨 돌기둥과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당당하다. 당당함이 키 작은 돌기둥의 외모를 충분히 덮어버렸다. 더하여 출생년도도 비교적 명확하다.


동쪽의 당간지주 전면에 해서체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당간지주의 내력을 알 수 있음이 다행이다. (다만 현장 안내문과 글 쓴 내용이 다르게 표시되는데, 문맥에 따라 해석을 하신 강릉향교 최기순 전교의 해설에 따라 갈음했음을 밝힌다.)


그 내용은 


‘전도교폐어지(戰道校廢於之) 거정덕무진복설(去正德戊辰復設) 우부사남공혜관지시(于府使南公惠寬之時) 가경정축팔월일(嘉慶丁丑八月日)’로, 1508년(중종3)에 무너진 것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강릉부사 남혜관에 의하여 1817년(순조17)에 다시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당한 돌기둥, 규모는 작지만 숨 쉬고 있었다면 다부진 부지런함을 가졌을 것이다. 도심 아가씨의 마음을 충분히 뺏고도 남음이다. 


문득, 아가씨와 총각 돌기둥이 서로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아, 주례는 굴산사지 돌기둥이 해주면 되겠다.

 


마을이 안녕을 위하여 늠름하게 선 장군과도 같은 굴산사지 당간지주, 도심 아가씨의 세련되지만 순박한 대창리 당간지주, 그에 걸 맞는 당당한 총각, 수문리 당간지주였다. 

 

강릉 땅의 당간지주는 이렇듯 길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길 나섬의 설렘을 아는 듯, 충분히 배려하며 맞아주었다. 여유 있는 길의 평안함, 강릉의 당간지주를 만나 가면서 느꼈던 특별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서 있을 돌기둥, 당간지주는 오늘도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줄 것이다. 

 

스치듯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이라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미소 짖고 있을 것이다. 그 미소를 나그네들은 오늘도 스쳐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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