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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2] 강릉 문화답사 1> 강릉 정자(亭子)기행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2-15 22:39:40
  • 수정 2024-03-23 0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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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기자] ‘정자(亭子)’라는 이름은 한자다. 

그대로 풀이하기 보다는 의미에 뜻을 둔다. ‘경치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해 지은 집’이란 뜻이다. 그냥 양반네들 놀기 위한 공간이라 보면 거의 들어맞는다.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백운거사 이규보(白雲居士 李奎報, 1168~1241)’는 ‘사륜정기(四輪亭記)’에서 “나무판자를 쌓은 것을 ‘대(臺)’, 겹으로 난간을 한 것을 ‘사(謝)’,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누(樓)’라 하고, 사방이 툭 트이고 텅 비고 높게 만든 것이 ‘정자(亭子)’다”라고 했다.

“한 여름 놀러 온 이들과 자리를 깔고 누워 자거나 술잔을 돌리거나 바둑을 두거나 거문고를 타며 하고 싶은 대로 즐기다가 날 저물면 파하니 바로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자리를 자주 바꾸니 그때마다 자리와 베게, 책, 거문고, 술병, 바둑판이 사람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니 자칫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라며 “바퀴달린 정자를 만들어 쉽게 옮겨 다닐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만들지는 못(안)했다. 만약 만들었다면 어느 기사의 말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캠핑카 쯤 되는 것이다.

 

결국 양반네들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욕망(?)을 표출한 것이 ‘정자’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에 “655년(의자왕15)에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라는 것이 우리나라 정자의 첫 기록이다. 이후 궁궐 내에 대규모의 누정이 들어서기 서기 시작했고, 고위직들의 정원에, 양반네들의 집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궁에서는 회의와 집전을 위한 ‘루(樓)’를, 관리들과 양반네들은 ‘정(亭)’을, 민초들은 밭과 논에 ‘막(幕)’을 지었다.


결국, 루와 정은 주위의 풍경에 어울리는 조경에 신경 씀으로서 (신선)놀음과 이상향을 꿈꾸는 공간으로, 민초들은 살아가는 영역의 한 곳으로 쓰임새가 갈린다.

 

정자를 대하는 양반의 쉼과 민초의 쉼은 결이 다르다. 


정자를 기획하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관점이 양반의 쉼터로서의 정자라면, 육체의 고단함과 수고로움을 끝냈을 때의 원두막은 민초의 쉼이었다.


요컨대, 길손 개인적으로는 성리학, 유교 정신을 찬양하지 못한다. 신분질서속의 계급사회는 결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생각한다. 인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의 소양 속에 글 모르는 민초는 비참함을 이겨내며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양반네라며 우기며 관혼상제에 의한 예를 갖췄다. 이 또한 유교적 관점인 것이다. 그리 보이도록, 하도록 노력하는 군중의 심리였던 것이다. 


길손의 눈에 성리학은 '허례허식虛禮虛飾'이다.

 

강릉의 누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시를 짓고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바둑을 두었으며, 술판을 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쉼’보다는 ‘놀음’의 자리로 변한 공간이다. 즉, 정자는 세속을 떠나 보려는 의도였다.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한국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 정자다. 


소위 ‘루(樓)’가 공공재의 성격이 강했다면, ‘정(亭)’은 개인소유의 성격이 갖는다.

 

여말선초 대 강릉지역에서는 관(官)의 주도로 건립되었고 대표적으로 ‘경포대(鏡浦臺)’가 있다. 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는 16세기 낙향한 고위층이 건립한 ‘해운정(海雲亭)’이 있으며,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그 의미가 크다. 


이후 18세기 중엽엔 강릉지방 권력계층이 정자를 세우니 ‘호해정(湖海亭)’, ‘금란정(金蘭亭)’등이다. 이후로는 스스로 양반들 이라하는 향촌의 지배층들이 계契를 결성하여 회원들이 모여 정자를 세우기 시작했다. 

 

강릉 경포대(鏡浦臺, 지방 유형문화재 제6호)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한곳, 경포대다.


율곡 이이는 “해 뜨는 이른 아침, 달 밝은 가을밤에 경포대에 올라 호수를 굽어보는 것과 호수 너머 동해의 푸르름을 대하고 나면 속세는 간 데 없고, 온통 선경이다.”라고 했다. 

 


1326년(고려 충국왕13)에 정면5칸, 측면5칸, 기둥32주의 누대로 세워진 팔작지붕의 건물로 우물마루 바닥을 두었는데 삼단의 높이 차이를 두어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라지는 위계를 세워 놓았다. 


1745년(영조21)에 강릉부사 ‘서주 조하망(西主 曺夏望1682~1747)’이 중건하였고, 1899년(고종36)에 강릉부사로 부임한 ‘강재 정헌시(康齋 鄭憲時, 1847~1905)’가 중건하면서 남과 북으로 ‘득월헌(得月軒)’과 ‘후선함(候仙檻)’의 누마루를 올리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이 제일경이라 볼 수 있으며, 당 시대 내 놓으라 하는 선비들과 명필가들의 작품들이 누각 안 곳곳에 붙어 있는 편액과 시판들을 만나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된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참배 장소로도 알려진 경포대는 조선 초기 태조와 세조가 직접 고을 순찰에 들렸던 곳으로 눈에 들어오는 경포호수의 아름다움에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와 함께 율곡 이이가 10살에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는 ‘제일강산第一江山’, 조하망이 중수하며 쓴 ‘상량문上樑文’, 서예가 유한지, 이익회의 ‘鏡浦臺’ 현판 등 여러 명사들의 기문과 시판들이 걸려있다. 

 

●강릉 선교장 활래정(船橋莊 活來亭, 국가중요유형문화재 제5호)



관동지역 문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집 앞 들판이 모두 경포호수였던 시대에 집을 드나들기 위해 배로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우리말로 ‘배다리’, 한자로 ‘선교船橋’라 했다.

1748년(영조24) 관동 최고 부호 ‘무경 이내번(茂卿 李乃蕃, 1703~1781)’이 터 잡고 100여년동안 건물들이 증축되었다. 


손자 ‘오은 이후(鰲隱 李后, 1773~1832)’가 1815년(순조15)에 ‘열화당悅話堂’을 이듬해 1816년(순조16)에 ‘활래정活來亭’을 지었다. 


이후 증손자 ‘경온 이근우(經農 李根宇, 1877~1938)’가 23칸의 행랑채가 증축하면서 10동의 건물에 120여 칸의 민간 궁궐의 규모가 되었다. 또한 삼국시대 고찰인 ‘인월사印月寺’가 있던 자리에 별서 ‘방해정放海亭’을 지었는데, 굳게 닫혀있어 이번 답사에서 제외했다.


이로써 “대궐 밖 조선 제일 큰집” 선교장이 된 것이다.

 


활래정의 위치는 좌청룡의 끝자락이다. 청룡이 짧은 것을 보완해주는 것으로, 명당의 생기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인공연못위에 세워진 정자로 주지번의 시 ‘관서유감’중 ‘위유원두활래수爲有源頭活來水’에서 따온 것으로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는 뜻으로 ‘활래정活來亭’이라 했다. 


연못속에 돌기둥을 주춧돌로 세웠고, 벽이 없이 문으로만 되었으며, 목재로 난간을 둘렀다. 손님 접대를 위하여 다실을 갖춘 마루와 온돌방을 두었으며 벽면 전부가 복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다.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다실이 있어 손님을 맏이 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얼핏 보면 ㄱ자의 정자로 보이지만 실제 활래정은 지붕의 결구가 각각인 두 채의 정자가 이어진 ‘쌍정雙亭’이다.

 


활래정을 품은 선교장은 조선 4대왕 세종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11대손의 상류층 가옥답게 궁궐과도 같은 규모의 대가다. 금강산 여행길에, 관동팔경 유람길에, 또는 지역 최고 부호와 연을 닿기 위해 수많은 명사들의 발길이 잦았다.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영의정 ‘운선 조인영(雲石 趙寅永, 1782~1850)’,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 1820~1898)’,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1947)’, ‘성재 이시형(省齋 李時亨, 1869~1953)’등 정치가와 독립 운동가는 물론, 풍류가와 시인, 묵객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강릉 해운정(海雲亭, 보물 제183호)



강릉 출신으로 정치가이자 문장가였던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 1487~1540)’이 강원감찰사로 있으면서 1530년(중종25)에 본가 옆에 지은 별당 건물이다. 지역에서는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로 정자로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온전한 보전상태다.


어촌은 1487년 강릉여고 인근에서 태어난 인물로, 1057년(중종2)에 진사가 되고 부제학,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문장에 뛰어났다.

 


늘 그렇듯 중종 대 정치판도 상당히 어지러웠다. 


중종이 누구인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서열상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1506년(연산군12)에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11대왕이다. 반정세력이 자신의 집을 에둘렀을 때조차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몰랐다. 중종이 반정세력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 후 중종은 왕권을 온전히 하고자 반정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를 등용시켜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을 만들었으나 과격한 개혁에 반정공신과 별 차이 없는 자신의 왕권에 해가 된다고 판단,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며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사림파들을 박살냈으며, 조광조 역시 유배 후 사사되었다.

 

이제 다시 권신들의 세상이 되었다. 권신정치의 포문을 연 ‘기묘삼간(己卯三奸)’과 ‘신묘삼간(辛卯三奸)’에 대항하기 위한 중종의 또 다른 선택은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던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 1481~1537)’였다. 세상사 시비걸기 좋아하는 인물하자 자신에 반대하는 인물에 잔인한 보복을 일삼는 외척세력이다. 


당시 유배지에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 때 심언광, 심언경 형제가 유배지에 있던 그의 문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즈음 1530년(중종25년), 강원도 감찰사로 있던 어촌 심언광은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궁으로 들어와 국방의 중요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권신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는데, 이에 대한 대응으로 김안로의 석방을 적극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를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김안로는 경빈박씨와 복성군을 죽이는 등의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켰으며, 정적에 대해서는 친족, 재상, 종친과 관계없이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하였다. 동궁을 보호한다는 명분에 중종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작금의 상황에 그의 등용을 적극 주장한 심언광은 괴로워했다. 특히 김안로가 자신의 외손녀를 동궁의 비로 삼으려 하자 이를 질책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둘은 갈라지게 된다. 


1536년 김안로의 악행을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역으로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김안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537년 문정왕후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들통이 나며 도 넘은 횡포를 방관하던 중종은 즉시 체포 유배시켰으며, 사사시켰다. 

 

문제는 심언광이 공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게 되고, 형과 함께 정승의 물망에도 올랐었으나, 김안로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배를 풀어주고 등용시킨 일로 대윤과 소윤에 의해 탄핵을 받고, 형 심언경과 함께 관직을 삭탈 당하게 된다.


훗날 1684년(숙종10)에 신원 복관 되었고, 1761년(영조37)에 ‘문공(文恭)’의 시호를 받았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중년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자 본가 옆에 ‘해운정’을 지었다. 조정의 부름에 나갔으나 짧았다면 짧은 찰나와 같은 7년의 정치상황은 뜻에 맞지 않는 아귀다툼의 정치판에서 신물을 뱉어냈다. 


차라리 경포호수의 한가한 바람과 경포바다의 푸름을 벗 삼았다면 삶의 모습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뜻이 있어 나라의 부름에 응했으나 휘몰아치는 정쟁 속은 문장과 풍류를 즐기던 어촌이 설 자리가 아니었다. 

 


시루봉에서 흘러내려온 줄기가 이어지고 앞으로 경포호가 펼쳐진다. 


명당이라 불리는 배산임수의 형태로 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자연과 잘 어울리는 풍경에 건물의 안정감이 더해져 마음이 잔잔해진다. 바스락거리는 걸음에 잘 정비된 마당을 지나 해운정에 올라 건너 보이는 경포호의 모습은 경포대에서 보이던 생동감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조금은 더 밝고 차분하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607~1689)이 쓴 ‘해운정海雲亭’ 현판이 걸려있고, 중종 때 사신을 맞는 ‘접반사(接伴使)’였던 어촌의 집에 들른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쓴 ‘경호어촌鏡湖漁村’, ‘오희맹(吳希孟)’이 쓴 ‘해운소정(海雲小亭)’ 현판이 있다. 외에도 율곡 이이등의 문인 명사들의 글씨와 시가 현판으로 새겨져 걸려있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3단의 축대와 기단을 가진 남향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다. 대청 띠살문 위에는 창방으로 결구했고, 분합문으로 달아 서까래 끝에 달린 들쇠에 매달 수 있게 했다. 대접받침을 올린 초익공(初翼工)으로 홑처마다. 연등천장에 귀틀을 짜서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2칸을 대청마루로 하였고, 1칸은 온돌방을 두었는데 중간에 미닫이문을 두었다고 한다. 


건물적인 특징으로만 본다면 ‘주심포(柱心包)’와 한국 최초의 ‘초익공공포(初翼工栱包)’이며, 지붕구조를 받는 구조물의 ‘충량(衝樑)’이 있다. 지붕보의 중간에 아기처럼 작은 기둥(동자주童子柱) 을 세워 꾸민 지붕틀의 ‘외기도리’를 했으며 조선 초 유행했던 대공에 물결, 구름, 꽃등의 문양을 넣은 ‘파련대공’과 ‘달동자(매달려 있는 동자?)’가 있다.


 

정치가이기 보다는 시와 문장, 그림에 뛰어났던 어촌 심언광,


다시 해운정을 찾았으나, 그가 머문 시간은 3년 남짓이다. 50의 나이에 찾은 자신의 쉼터에서 내려놓는 마음을, 버리는 욕심을 찾았을 것이다. 청렴한 삶을 살고자하는 의지를 보인 그의 호 ‘어촌(漁村)’처럼 해운정에서 그는 그만의 삶을,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정치판이 아닌 곳에서 어촌의 신념을 발휘했다면 어떠한 삶이었을까, 시(詩)로 마음을 쓰고, 그림(畵)으로 세상을 비추고, 글(文)로 자신의 기운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해운정은 그러한 문장가의 기운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서있다. 어촌의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서있다. 해운정에서는 그래서 사람이 차분해진다.

 

경포대에서 바다로 가는 길에 연이어 ‘경호정(鏡湖亭)’, ‘상영정(觴詠亭)’, ‘금란정(金蘭亭)’ 3개의 정자가 있다. 정자들은 모두 계에서 설립한 정자들이다. 


●강릉 경호정(鏡湖亭)



1927년 지역주민들이 창회계暢懷棨를 조직하고 강신講信활동을 위해 건립되었다. 정면2칸, 측면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탁 트인 정자와는 다른 모습으로 별채까지 두었다. 정면 2칸에는 세살문을, 측면2칸에는 판합문을 달아 놓아 언뜻 절집 같다. 정자에는 해서와 전서로 쓴 2개의 ‘경호정(鏡湖亭)’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경호정기(鏡湖亭記)’, ‘경호정상량문(鏡湖亭上樑文)’과 기문, 시판들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 있는 별채에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에 계원들이 모여 강론 하던 곳으로 사용되었을 것 같다.

 

●강릉 상영정(觴詠亭)



1886년(고종23)에 지역 향토유림 16명이 상영계觴詠契를 조직하여 강신 활동을 위하여 건립된 정자로 영귀암 인근에 건립되었다. 모임의 이름 상영계에서 정자의 이름을 따왔는데 196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정면3칸, 측면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2칸에는 마루를 놓았고, 1칸은 4쪽 세살문을 달았다. 정면에 ‘상영정(觴詠亭)’ 현판이 달려있으며, 석농 최대순, 경운 김영래의 시판이 걸려있다. 정자 안에는 계원의 이름이 기록된 ‘상영계원록(觴詠契員錄)’과 ‘상영정인(觴詠亭引)’등과 함께 기문과 시문이 걸려있다고 한다.

 

●강릉 금란정(金蘭亭, 도문화재자료 제5호)



정자를 보기 전에 정자를 세운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1446년(세조12)에 조직된 계회契會로 계가 재구성 된 1889년(고종26)에 선비 김형진이 경포대 북쪽 시루봉 기슭에 건립한 매학정을 ‘금란계원金蘭契員’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금란정金蘭亭’이라 했다. 이후 금란반월회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었다. 

 

금란반월회는 1466년(세조12), 성리학적 사회체계를 향촌에 정착시킬 목적으로 강릉지방의 중견 선비들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강릉 출신의 원로 ‘수재 최응현(睡齋 崔應賢1428~1507)’을 스승으로 15명의 문인들이 모인 것이 시작이다. 


이들은 ‘맹약오장盟約五章’이라는 회칙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길흉경조(吉凶慶弔: 좋은 일에는 술과 안주로 축하하고, 죽음이나 슬픈 일에는 부조한다.)’, ‘양진강호(良辰講好: 좋은 때를 가려 금 술잔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린다.)’, ‘과오면책(過惡面責: 주색에 빠지면 욕하고 나쁜 짓을 하면 술병을 들고 찾아가 나무란다.)’, ‘오령속금(忤令贖金: 모임에 늦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안 나오면 술과 돈을 벌 값으로 낸다.)’, ‘고행삭적(故行削籍: 위약하는 행동을 거듭하고도 깨우침이 없으면 명부에서 지워 없앤다.)’으로 훗날 향령鄕令을 만들어 강릉에서 시행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자료출처 : 강릉시공식블로그 http://pinegn.blog.me/221411285769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교양으로 입신과 출세를 득하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추구하게 된다. 


설립당시 세조의 비호를 받던 불교(상원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념으로 왕실의 비호속에 확장되어가는 사찰 세력에 의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성종이 집권초기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유학이념이 제도적으로 확립되면서 금란반월회는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482년(성종12)에 초기 회원이었던 ‘반곡 김대(盤谷 金臺)’가 왕에게 유향소 복립을 건의 하면서 중앙정치권과 긴밀한 연계를 가졌고 이는 정치적 상황과 맞춰져 강릉 지방에 성리학을 보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금란金蘭’이란, 역경易經에 “금이라도 쪼개서 나누니, 그 향기가 난과 같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뜻 그대로 우의를 다지고 상부상조 할 것을 다짐하며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 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모임이다. 


또한 맹약오장과 함께 16명의 이름, 호, 자, 출생지까지 기록된 ‘계회도(契會圖)’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계회도로 조선 초기를 연구하는 기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강릉 호해정(湖海亭, 지방 유형문화재 제62호)



“그 정취가 오히려 바다보다 나았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기록되어 있는 호해정에 대한 글로 사임당의 넷째 아들이자 율곡 이이의 동생, ‘옥산 이우(玉山 李瑀, 1542~1609)’는 시, ‘호해정湖海亭’을 남겼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 바다와 통하고

구름 속에 묻힌 산 아득하게 호수 둘렀네.

조화옹造化翁이 정성을 쏟아 놓은 곳

옛 사람들 살짝 몰래 정자 지었네.

호해에 비친 달은 둘이 되었고

상서로운 신선 땅 마을과 이웃했네.

이곳에 오르면 아련한 것 뿐

은하수 별나라에 배를 띄운 듯.

 

과거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14km에 이르던 호수는 4.4km로 줄어들었고, 공간에는 논과 밭이 펼쳐지고 그 끝엔 아파트가 들어서있어 더 이상 바다나 호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포 주변 정자 중에서 가장 한적하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정자라고 생각된다. 낮은 동산 위, 낮선 숲속에 조용히 내려않은 검은 정자다. 조용함은 아늑함까지 더해져 비록 시선이 막혀 있으나 답답함 없는 산중 은둔지의 최고 조건을 갖췄다.


정자는 은둔했으나, ‘호해정’의 주인은 쉼 없이 바뀌었다. 


주인에 따라 사라지고 지어지고를 반복해 왔다. 호해정, 그 삶은 결코 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자는 오히려 지금의 아늑함을 즐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처음에는 '현감縣監 김지金輊'의 후손 '습독공習讀公 김계운金繼雲'이 중종 재위시절에 창건했다. 후손이 없던 그는 큰 사위인 '별감別監 장호莊昊'에게 줬고, 장호는 자신의 호를 따서 ‘태허정太虛亭’이라 했다. 


이후 정자는 소실되었으며, 장호 역시 후사가 없자 조카사위인 공조참의 ‘옥봉 김몽호(玉峯 金夢虎, 1557~1637)’에게 정자 터를 내줬다. 옥봉은 넷째아들 김득헌金得憲에게, 김현감은 다시 사위 '신만辛晩'에게 주었다. 


1718년(숙종44), 대학자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이 66세 되던 해 강릉에 들렀다가 경포의 매력에 빠졌고 명승이라며 감탄하자 신만의 아들 신성하辛聖河가 삼연을 위해 작은 초가草家를 지어 머물기를 권했다. 


이에 삼연은 “조도鳥島와 경호鏡湖의 안개가 연기와 만나는 경치가 기이하고, 사람들이 머물기를 권하니 정성스런 마음을 거절할 수 없노라.”는 내용으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삼연은 호해정에 머물면서 학문과 시론을 강론했으며, 수시로 경포호에 배를 띄우고 시를 읊었다. 1년 가까이 무심無心의 시간을 가졌던 삼연이 떠났으나 삼연을 흠모하는 이들이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이곳을 찾아왔다. 신성하의 손자 진사進士 신정복辛正復이 삼연의 뜻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강론을 펼쳤다. 


그러던 1750년(영조26), 초옥이 소실되자 지키지 못한 것에 수치스러워하며, 다시 정자를 지으니 지금의 ‘湖海亭’이다.



1834년(순조34)에 옥봉의 후손들이 신씨辛氏로부터 정자를 인수하였으며, 1913년 옥천동 영당影堂에 봉안되어 있던 영정을 이곳으로 옮기고 향사享祠를 지내고 있다.


이렇듯 호해정은 많은 손을 탔으나 실제는 모두 가문들이다. 


당시 ‘재지사족(在地士族: 향촌사회에 뿌리내리고 살아오던 지식계층=양반)’가문들의 재산 증여의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정자인 것이다. 

 

정자는 정면2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방1칸, 영당1칸, 우물마루방1칸이다. 방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하나의 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전면에는 초서체, 측면에는 해서체로 ‘湖海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훈곡 홍희준(薰谷 洪羲俊, 1761~1841)’이 쓴 ‘호해정기湖海亭記’, ‘경산 정원용(經山 鄭元容, 1783~1873)이 쓴 ‘김씨호해정기金氏湖海亭記’, ‘김병환(金秉煥)’의 ‘호해정중수기湖海亭重修記’등 3개의 기문이 있으며, ‘옥산 이우(玉山 李瑀)’가 장호에게 증정한 ‘호해정湖海亭’시판등과 함께 여러 편액들이 정자 안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른바 지배계급들의 세속을 잘 보여주는 정자다. 


양반이라 불리는 성리학을 배운 가진자 들이었다. 그들은 호해정을 쥐락펴락했다. 처음의 그 자리는 이미 잊었고, 땅에 묻힌 초가의 기운도 사라졌다. 이제 세월이 만든 색감의 목판만이 호해정을 감싸고 있다. 


이대로 편할 것이다. 


더 이상의 세력에 흔들리는 않는 그러한 시간에 공간의 안정감이 더해진다. 호해정은 지금 이대로가 편안할 것이다. 


호해정은 길손의 마음에 가장 크게 와 닿는 곳이다. 형태와 색이 가진 기분에 편안한 곳, 늘 그리울 것이다. 

 

●강릉 방해정(放海亭, 지방 유형문화재 제50호)


선교장의 별서로 알려져 있으나, 굳게 닫혀 있는 관계로 답사를 할 수 없다.

 

그 외에 1950년대 후부터 향촌사회의 계원들이 설립한 정자들이 경포호수 주변으로 자리하고 있다. 월파정(月波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석란정(石蘭亭), 취영정(聚瀛亭), 환선정(喚仙亭) 등이다. 


“강릉은 사람3명만 모이면 계를 한다.”고 할 정도로 계 활동이 활발하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큰 계에서는 조직의 이름으로 정자를 세웠다.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자들이 길손의 눈에는 탐탁치 못하다. 옛 선비들이 가장 기본으로 여기던 자연과의 어울림에 기본적으로 어긋난 결과물들이다. ‘나 양반이요!’라는 모습뿐이다. 정자의 모습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다. 


혹,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 시기심에 함부로 지껄인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자의 눈에도 부조화의 정자다. ‘쉼’을 상실한 ‘단합’뿐이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가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 담던 경포호수다.


먼 어제, 바다였던 곳이 해안사구로 막히면서 만들어진 자연석호다. ‘거울처럼 맑다’ 하여 ‘경호(鏡湖)’라 했고,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준다’하여 ‘군자호(君子湖)’로 불렸다. 


경포팔경이라 하여 경포호수를 찬했고, 호수와 술잔에 담긴 달을 찬했던 명승이다. 호수 가운데 새바위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쓴 ‘조암鳥岩’이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그러나 어떠한가, 


호수 한가운데, 조암(새바위)의 넉넉한 풍경위에 덩그러니 세워진 콘크리트 구조물, 

바로 '월파정月波亭'이다. 아름답기보다는 흉물스럽다. 


5개의 달을 찬했는데, 부서지는 달빛이란다. 호好, 불호不好는 갈린다. 계원들에게 욕먹을 일이겠지만, 길손에게 월파정은 ‘불호不好’다.


1958년 기해생己亥生 동갑계원 28명이 건립한 것으로 팔각의 콘크리트구조물이다. 기와지붕위에는 두루미 조형이 올려 져 있다. ‘달빛이 부서지는 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경포호수 한가운데 우암선생의 글씨가 남아있는 새바위 위에 있는 정자다. 

 



눈으로 즐기는 풍경여행,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안위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상의 의미는 무의미한 것이고, 궁금함을 구하려 파면 기분만 잡스러워진다. 이럴 때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같은 코로나 정국에 풍경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음이 감사 할뿐이다. 무식을 채워간다. 강릉으로의 여행길이 기분 좋은 이유다./글, 사진=박성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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