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인천의 꿈, 대한민국의 미래 1] 중구 생활사전시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6-11 05:15:05
  • 수정 2024-06-15 23:30:42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인천항이 자리한 인천광역시 중구는 '제물포'가 위치한 곳이라는 점에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 이름은 조선시대 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군사시설 제물진에서 유래했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중구일대에는 일본, 청국인들의 거류자가 만들어졌다. 


도크 준공식장으로 향하는 시민들

또 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고 주변에는 외국인 공동거류지인 각국조계가 생겨났다.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식 건축물과 시설들이 마련되자 개항장 일대는 상당히 이국적인 도시로 변화했다. 


소월미도 매립지 공사

하지만 1910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중구 일대는 점차 일본인 위주의 도시로 변화되었고, 1945년 광복 전까지 인천 내의 조선인들은 주제가 아닌 주변인으로서 생활했다. 광복 후인 1949년 8월 인천은 경기도 인천시가 되었고, 1968년 1월 행정적으로 구제가 실시되면서 동구.남구.서구. 북구와 함께 중구가 탄생했다. 


# 1960년-1970년대 인천 중구

-개발계획 추진과 도시기반 시설 확충


제 2도크 공사 현장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인천과 중구는 광복과 6.25전쟁으로 인해 도시기능이 완전히 마비 상태에 있다가 휴전과 동시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한 시기이다. 특히 피난민과 이농 인구의 유입으로 인한 도시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인천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년-19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 


인해공단들과 부평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이를 위한 각종 기간 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이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됐다. 이러한 경제개발의 중심에 인천항이 있었고 중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천 내항의 도크 확장(1966-1975), 그에 따른 연안부도의 축조(1973), 경인고속도로의 건설(1967-1968), 경인전철의 부설(1971-1974) 등 어느 것도 중구에서 진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동인천지하도 기공식


중구를 중심으로 한 인천의 이러한 성장은 주변 지역에도 영향ㄴ을 주어 각종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구 증가를 가속화시켰다. 인천시가 구제를 실시하던 당시(1968), 서울.부산.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했고,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켜 인구 100만명을 돌파하면서안천작할시로 승격했다. 


이 시기 인천과 중구에는 도로와 교량, 공영아파트 건설, 지하차도, 지하상가 조성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사업이 지행됐다. 현재 인천의 지하상가는 동인천역부터 신포동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데, 1971년 새인천으로 시작으로 1974년 동인천, 1977년 중앙로가, 그리고 1980년대 인현과 1983년 신포지하상가 등 모두 5개의 지하상가가 이어져 조성됐다. 


혼분식 장려 여성 단합대회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동인천역 광장에서 청소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을 기점으오 의.식.주 전반에 걸쳐 사회질서 정착과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걷기운동 가두 캠페인, 식생활 개선 주부 궐기대회, 건전가요 오락보급강습회, 혼분식 장려 여성(장려 여성 단합대회, 반공가요경연대회, 주부 대상의 편물강습회 등 캠페인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구는 당시 인천시 행정의 주심인 시청이 위치해 있어 인천시의 변화가 곧 중구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거리에서의 청소년캠페인이 진행되는 광경이나 무관심 속에 민둥산이 되었던 산과 들에 나무를 이식하는 식목일 나무 심기 모습, 도시를 정화하고 소독하기 위해 살충제 연막거리 살포나 전염병 예방접종광경 등이 흔히 나타나고 있다. 당시 콜레라, 장티푸스에 걸리면 치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모두가 팔을 걷었다. 


가두 예방 접종

경제부흥의 기치 아래 도시개발계획이 진행되는 속에서도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문화면에서 벌견된다. 구제실시 기념 시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 1962년 창단된정부 운영의 국립예술단 예그린 악단의 인천 공연이 눈에 띈다. 또 1965년 제1회 시민의 날이 제정된 이래, 1970년대에도 이어져 시민들이 함께 모여서 즐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 오늘날 시민 혹은 구민의 날 출발이었다. 


우량아 선발대회

당시, 흥미로운 광경 중에는 우량아 선발대회가 개최되었던 점이다. 이 대회는 생후 6개월부터 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참가했는데, 우량아의 기준은 질병이 없어야 하고, 각종 예방접종을 빠뜨리지 않고맞아야 하며 무엇보다 체중과 가슴둘레 등 신체발당과 영양상태가 좋아야 했다. 대부분 키 크고 살집 좋은 아일들이 우량아로 뽑혔다.  

 

카퍼레이드/카페이드 선두 차랸에는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투포한 금메달리스트 백옥자 선수가 탑승했다. 그는 십정동에서 태어나박문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선거 유세나 계몽 강연회 외에도 도원동 공설운동자에서는 전국체전은 물론, 전국 빙상대회나 사이클 경기대회가 개최 되곤 했다. 야구와 축구가 시작된 구도답게 이 시기 스포츠 선수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고 금의환향한 인천 선수들이 동인천역에서 시청까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당시 카퍼레이드 선두 차량에는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투포한 금메달리스트 백옥자 선수가 탑승했다. 


# 중구, 의.식.주생활 문화 회상  


특히, 이 시기 중구구민의 생활 모습은 의식주를 중심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의생활 문화를 대변하는 것은 역시 양복점과 양장점 등의 유행이었다. 1960년 대 내동 양복점 상가 거리는 패션의 1번지였다. 지금은 없어진 춘방양복점, 자유라사, 골댄라사, 제이씨양복점, 양장점.천일 양품점, 백마, 문화양품점이 있었고, 현재 운영되고 있는 이수일양복점, 황제양복점, 신라라사 등이 널리 알려진 상호들이었다. 


내동 패션거리

골덴라사당시 식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음식점으로는 주로 신포동 일대에 자리했던 화선장, 천미복집, 답동관, 화신면옥, 이화정, 오부자집, 금화식당, 큰무리식당과 명성 있는 노포로서 경동으l 설럴탕집 삼강옥이나 신흥동의 해장국집 평양옥, 신포동의 횟집 유래, 사동의 족탕집 선미정, 신생동의 이조복집, 내동의 냉면집 경인면옥, 중앙동의 대성불고기, 중앙설렁탕, 해안동의 등대경양식, 항동의 우정일식, 그리고 중앙동의 서민 백반집 명월집, 신포동의 청실홍실, 양지부대고기, 미락 등은 오늘날까지도 왕성히 영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이 주고객이었던 인천도나스, 용일당, 명물당, 맛나당은 사라졌고 신신옥, 청실홍실, 신포우리만두 등은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여기에 대성제과, 신라제과, 별제과 등 제과점도 당시 만남의 장소로 학생부터 성인까지 애호했던 공간이었다. 


인천도나스이 시절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을 중구 신포동 일대에 있었던 서민 주점은 대표적으로 옛 영염집, 오술해, 대전집, 충남집, 돼지족과 스지탕으로 유명한 다복집, 전을 잘 부치던 마냥집, 약주 본산 신포주점, 대동강, 백항아리집, 밴댕이회를 주로 팔던 북성동 수원집 등이있다. 오부자집 옆 옛 농협 자리에서 물텀벙이를 끓이던 영화주점은 1970년대 중후반 무렵 문을 닫았고, 신포시장 골목 미미집 같은 곳은 1980년대 초에 생겼다가 1990년대에 신포동을 떠났다. 극장식 주점인 국일관과 대형주점인 화백, 로제켈러 등도 있었다.

 

다복집

학다방

이 중에서 현재도 영업을 하고 있는 주점들은 주인이 바뀐 신포주점, 마냥집, 새로 창업한 염염집과 2대에 걸쳐 이어오는 대전집, 다복집, 그리고 전동의 삼치구이집인 인하의 집 등이다. 


지금도 커피숍이나 서양식 카페가 차고 흘러넘치지만 예전에는 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거의 쇠퇴해 사라지고 없다. 특히 중구 신포동, 용동, 내동, 인현동, 시청이 있던 시절의 관동,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인천부윤관사

내동초가집

은성다방, 짐다방, 별다방, 유토피아다방, 신포다방, 르네상스다방, 흙다방, 태양다방, 상록수다방, 우봉다방, 삼미다방, 소월다방, 성지다뱡, 미담다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재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은 신포동의 국제다방과 경동의 학다방 정도이다. 


주거문화는 근대 개항 후 인천의 중심 지역답게 서양인 주택, 신흥 부유층의 기와집, 일제 강점기 일본식 주택, 그리고 한국 서민들이 살던 전통 초가집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30년대 지어진 모던한 형태의 서양식 유항렬 도선사 주택은 아직도 남아 있고, 율목동 골목 안에 자리한 기와집 동네는 20간, 30간 정도의 기와집들이 양편으로 대략 20여 호쯤 나란히 도열해 있었는데, 신흥부유층의 공간으로 인식되었지만, 모두 철거되어 상가 건물이 되고 말았다. 


옥인사

대한서림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은 1960년대, 1970년대에는 대부분 그대로 있었는데, 지금은 중앙동, 송학동 등에 몇 채만 남아 있고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율목동 인천부윤관사는 개인 주택으로 남아 있다. 


당시를 기억하게 하는 문화 공간들을 찾아보면, 율동공원과 자유공원, 이집트미술관, 그리고 영화나 연극 등을 보기 위해 찾았던 인영, 동방, 키네마, 인형 등은 사라지고 지금은 애관만이 경동에 남아 극장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독서가 교양의 척도가 되는 권장사항이었던 시절, 학생들의 학습서는 물론, 성인들의 탐구 열을 채워주었던 서점으로는 동인서관과 대한서림이 남아 있고, 문구점으로는 양지공사, 축현문구가 있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