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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문화재 346] 종교와 이념 넘어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
  • 박광준
  • 등록 2024-06-03 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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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 사유의 방: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사유의 방’에는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어둡고 고요한 사유의 방을 걸어 들어가면 끝없는 물의 순환과 우주의 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시공을 초월한 초현실의 감각을 일깨우며 반짝임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1,4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우리 앞에 있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만나게 된다. 



종교와 이념을 넘어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이 세상 너머를 바라보는 듯, 고뇌하는 듯,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듯,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고, 치유와 평안이 다가온다. 두루 헤아리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사유의 방’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여정은 우리 시대의 특권이다.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만나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나의 경험, 나의 여정,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 사유의 존재, 반가사유상의 의미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가볍게 얹고 오른손을 살짝 뺨에 댄체, 눈을 가늘게 뜨고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상의 자세에서 비롯됐다. '반가(반가)는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어 앉는 '결가부좌'에서 한쪽 달리를 내려뜨린 자세이다. '사유'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를 나타낸다. '반가의 자세로 한 손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불상'응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는 태자 시절부터 인간의 생로병사를 깊이 고뇌했고, 출가를 결심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도 깊은 생각을 거듭했다. 반가사유상은 이처럼 깊은 생각에 빠진 석가모니의 모습이면서, 깨달음을 잠시 미루고 있는 수행자와 보살의 모습이기도 하다. 반가의 자세는 멈춤과 나아감을 거듭하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움직임 가운데 있다. 한쪽 다리를 내려 가부좌를 풀려는  것인지, 다리를 올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갈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반가의 자세는 수행과 번민이 맞닿거나 엇갈리는 순간을 보여준다. 살짝 다문 입가에 잔잔히 번진 '미소'는 깊은 생각 끝에 도달하는 영원한 깨달음의 찰나를 그려 보게 한다. 이 찰나의 미소에 우리의 수많은 번민과 생각이 녹아들어 있다. 


# 반가사유상의 미학 : 조화와 균형



반가사유상은 단독 예배상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신앙의 경지를 최고의 예술로 승화시킨 두 점의 국보 반가사유상은 세속의 감각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표정과 옷차림, 크기와 무게, 제작 시기도 모두 다르다. 전시실 왼쪽의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날카로운 콧대와 또렷한 눈매,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정제돤 옷 주름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앙옆으로 휘날리는 어깨 위의 날개옷은 생동감을 주고,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걸이와 팔 장식은 화려함을 더한다. 



이보다 조금 늦게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전시실 오른쪽 반가사유상은 단순하고 절제된 양식을 보여 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세 개의 반원으로 이루어진 보관의 형태와 두 줄의 원형 목걸이는 간결함을 더한다. 반면, 무릎 아래의 옷 주름은 물결치듯 율동감 있게 표현되어 입체적으로 흘러내리며 역동성을 보여 준다. 양손의 손가락들에선 섬세함이 느껴지고, 힘주어 구부리고 있는 발가락에는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 반가사유상의 제작 기술


두 점의 반가사유상에는 삼국시대의 최첨단 주조 기술이 담겨 있다. 주조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수직과 수평의 철심으로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대좌까지 뼈대를 세운 뒤에 점토를 덮어 형상을 만든다. 거기에 밀랍을 입혀 반가사유상 형태를 조각한 다음, 다시 흙을 씌워 거푸집(외형)을 만든다. 거푸집에 뜨거운 열을 가하면 내부의 밀랍이 녹아 반가사유상 모양의 틈이 생긴다. 여기에 청동물을 부어 굳힌 다음 거푸집을 벗기면 반가사유상이 완성된다. 



이때 청동물이 굳으면서 거푸집이 깨질 수도 있기에, 매우 세심한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두께 0.2-1.0cm 정도, 크기 1m에 가까운 금동 반가사유상을 만들어 낸 삼국시대 주조 기술과 그 수준은 세계인이 놀랄 만큼 돋보인다. 주조 후 거푸집을 고정했던 장치나 못을 제거한 흔적도 보이지 않아 그 당시 금속 가공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제작 당시에 보수했거나 후대에 수리를 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 반가사유상의 소장 경위와 제작지


두 점의 국보 반가사유상을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고,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국보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오른쪽) 한 점은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요시히데에게 2,600원이라는 큰 돈을 주고 구입했다. 



또 다른 한점(전시실 왼쪽)은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가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후치가미사다스케에게 4,000원을 보상해 주면서 구입 했고,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입수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인수했고,이왕가박물관(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은 1969년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다. 


반가사유상을 보존하고 있던 사찰과 만든 곳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고, 옛 사람들의 말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보관 상태, 장신구, 옷 주름 등의 모양으로 살펴볼 때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반가사유상(전시실 오른쪽)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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